정지룡(鄭芝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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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해상 무장 상인 세력의 우두머리.

개설

자는 비황(飛黃, 飛皇)·비홍(飛虹)이며, 일관(一官)·노일관(老一官)이라고도 한다. 복건 천주부(泉州府) 남안현(南安縣)의 석정촌(石井村) 출신이다. 19세에 오문(澳門), 즉 마카오에서 그 외할아버지를 따라 포르투갈인들의 무역에 참여하였다.

정지룡은 해구 소탕과 지역 방어의 일부분을 담당하며 군사적으로 성장해 갔다. 명의 관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복건 연해의 중소 해적들을 평정하였으며 네덜란드의 무력 도발도 제지하여 중국 동남해의 해상권을 제압하였다. 상업 활동에서도 해금을 이용하여 스페인이 장악한 필리핀·네덜란드가 차지한 대만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차익을 올렸다. 1646년 청나라 군대가 복건에 진주하자 청에 투항하였다.

활동사항

1623년 일본에 가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처음 해상(海商) 이단(李旦)에게 의지하였다가 뒤에 그를 이어 해상 상인 집단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되었다. 1627년 복건 연해 수비거점인 동산소(銅山所)와 중좌소(中佐所)에 난입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명의 포섭을 받아들여 유격(遊擊)의 지위로 명의 해변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후 중소 해상 집단들을 제압하면서 해상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선단은 일본· 대만·필리핀·교지·동포채·섬라·바타비아·말레이반도 등지까지 활동 영역이 넓었으며, 중국의 해금을 이용하여 대만과 일본을 연결하는 근거리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1633년 정지룡의 무역 독단에 불만을 가진 네덜란드인들이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원하며 대규모 무력 공세를 해왔으나 정지룡 세력은 이들의 대부분을 수몰시키거나 불태우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였으며, 선박 6척을 노획하고, 포로 110여 명을 잡아들이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복건 연해 일대는 정지룡에 의하여 완전히 장악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은 중국 연해에서의 교역은 정지룡에 의지하여야만 진행할 수 있었다.

1628년 복건에 큰 가뭄이 들자 광동에서 곡식을 사서 복건에 들여왔으며 스스로 자금을 내고 자신의 선박을 동원해 굶주린 백성 수만 명을 대만으로 이주시키고 개간하도록 하였다.

명이 망하자 정지룡은 복건에서 자신의 세력을 바탕으로 당왕을 옹립하여 남명 융무 정권을 수립하고 청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646년 청이 복건에 진입하자 정지룡은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에 항복하였다. 이후 청은 정지룡에게 아들을 귀순시킬 것을 종용하였으나 정지룡이 실패하자 그에게 모반죄를 씌어 처형하였다.

조선에서 정지룡을 인지하게 된 것은 1647년(인조 25) 무렵이었다. 당시 경상도 거제현 부근의 해안에 복건의 상인들이 표류하였는데 조선은 그들로부터 남중국에 당왕이 즉위하고 정지룡 등이 그를 위호하고 있으며 4개 성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 등을 파악하였다(『인조실록』 25년 7월 18일). 또한 정지룡의 손자 정금(鄭錦)이 오삼계와 연계하여 세력이 공고히 되었다고 알려지자 청을 섬기는 것을 책망할 것을 우려하여 정금에게 사신을 파견할 것을 논의한 적도 있다(『숙종실록』 1년 1월 24일).

참고문헌

  • 『대만외기(臺灣外紀)』
  •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 『청사고(淸史稿)』
  • 백옥경, 「18세기 연행사의 정보수집활동」, 『명청사연구』 38, 명청사학회, 2012.
  • 우인수, 「17세기 후반 대만 정씨해상세력(鄭氏海上勢力)에 대한 조선의 정보 수집과 그 의미」, 『대구사학』 100, 2010.
  • 원정식, 「명청시대 복건의 상인과 국가권력」, 『명청사연구』 13, 명청사학회, 2000.
  • 한지선, 「명말 정지룡의 해상제패 과정」, 『명청사연구』 34, 명청사학회, 2010.
  • 蘇同炳, 「『臺灣外紀』關於鄭芝龍早期史事硏究」, 『史聯雜誌』 30-31, 中華民國台灣史蹟研究中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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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夏蓓蓓, 「鄭芝龍:十七世紀的閩海巨商」, 『學術月刊』, 上海市社會科學界聯合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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