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산성(鼎足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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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함.

개설

강화도의 남쪽 지역에 위치한 정족산성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형적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삼국시대 최초 축조되었고 이후 조선후기인 영조대에 들어서 다시 수축되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양헌수 휘하의 조선군의 공격에 크게 패하여 물러나기도 한 곳이다.

위치 및 용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족산의 주변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최초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한강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 매우 험준하여 동쪽과 남쪽의 두 길만이 통행이 가능한 천험의 요새지로서 방어에 유리하다.

변천 및 현황

정족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의 기록과 현존하는 성곽의 구조가 삼국시대 산성 축조 기법과 비슷한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쌓은 백제 계통의 성으로 추정된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이곳에 임시 궁전인 가궐(假闕)을 설치하였다. 1660년(현종 1) 삼랑성에 장사각(藏史閣)을 지어 마니산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1738년(영조 14) 기존의 성터에 김노진(金魯鎭)이 다시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5리에 달하였고 치첩(雉堞)은 705개소였다.

형태

해발 220미터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는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2,300미터 정도이다. 주위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곽 시설로는 동문, 남문, 서문, 북문 등 4개의 대문과 4개의 치성(雉城)이 있다. 남문에는 문루인 종해루(宗海樓)가 있으며 북문은 암문(暗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에는 전등사, 정족산사고, 군창, 군기고 등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60년(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 당시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에 대응하여 조선에서는 대장이경하(李景夏)의 지휘하에 수천 명의 병력을 강화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천총(千摠)양헌수(梁憲洙)는 화력 면에서 우세한 프랑스군을 정면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11월 7일 정예 포수 500여 명을 거느리고 강화 해협을 심야에 도하하여 정족산성에 비밀리에 집결하였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입성 소식을 보고받은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올리비에대령을 파견하여 정족산성을 점령할 것을 명령하였다. 프랑스군 150여 명이 동문과 남문 100미터 지점에 이르자 조선군은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였다. 조선군은 화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상의 이점과 효과적인 사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군은 5명의 사상자뿐이었으나 프랑스군은 6~7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종실록』 3년 10월 5일). 이 전투를 계기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프랑스군은 강화에서 철수하게 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강도지(江都誌)』
  • 『강도부지(江都府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화군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 서인한, 『병인·신미양요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 이형구, 「강화도 삼랑성 실측조사 연구」, 『백제논총』5,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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