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창(丁汝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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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해군 제독.

개설

정여창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 가담하였으나 이후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병한 정부군에 투항한 후 역으로 태평천국군을 공격,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 반청 무장집단인 염당군(捻黨軍) 토벌에도 공을 세워 참장(參將)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에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같은 사건이 발발할 때마다 정여창은 이홍장의 명으로 함대를 이끌고 조선에 출병하여 사건을 진압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연이어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정여창은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전투를 벌였다.

활동 사항

정여창은 1854년에 태평천국의 난이 고향 여강에까지 확산되자 태평천국군에 참가하였다. 이후 1861년 증국번(曾國藩)이 이끄는 상군(湘軍)이 태평천국군을 포위, 공격하자 투항하였다. 이듬해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편입되어 태평천국군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그 용맹함을 인정받았다. 또 1868년 유명전(劉銘傳)을 따라 반청(反淸) 무장집단인 염당군 토벌에 공을 세워 참장으로 임명되었다. 1875년 이홍장은 신식군대를 조직하면서 정여창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여 해군 창설에 참여시켰다.

정여창은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거느리고 인천으로 들어왔다(『고종실록』 19년 3월 15일). 같은 해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 정부는 정여창에게 위원(威遠)·양위(揚威) 등 북양함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출병하여 군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정여창은 마건충(馬建忠) 등과 조선에 도착하여 군란의 지도자로 지목된 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天津)으로 데려갔다(『고종실록』 19년 7월 16일).

1884년에도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상황을 시찰하고 정변을 진압하였다. 이듬해인 1885년에는 영국 해군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자 역시 군함 초용(超勇) 등 2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상황을 살피고 이홍장에게 보고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20일). 1888년 북양함대가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정여창은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정여창은 군함 제원(濟遠) 등 2척을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농민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정여창에게 북양함대를 지휘하여 전쟁에 임하게 하였다. 정여창이 이끄는 함대는 황해도에서 일본 해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으나 북양함대는 12척의 주력함대 중 5척을 잃었다. 그는 남은 북양함대를 이끌고 산동성 북동부의 위해위(威海衛)로 퇴각하였다.

1895년 1월 일본군이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영성에 상륙하여 청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정여창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위해위가 공격당하고 해상과 육지가 모두 포위되면서 정여창은 결국 투항하고 자신은 음독자살하였다. 정여창이 죽은 후 북양함대는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참고문헌

  • 구선희, 『한국 근대 대청정책사 연구』, 혜안, 1999.
  • 권혁수, 『19세기 말 한중 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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