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각백(鄭牙各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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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교구 신부로 1839년 기해사옥 때 처형당한 프랑스인 신부.

개설

정아각백은 샤스탕(Jacques Honoré Chastan)의 한자식 표기이다. 샤스탕은 1803년에 프랑스 알프드오트 프로방스의 마르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앙브뤵(Embrun)의 소신학교에서 예비 신학교 교육을 받은 뒤 1823년에 대신학교에 들어갔으며, 1826년 12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827년 1월 13일에 샤스탕은 해외 전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교하였으며, 그해 4월 22일에 파리를 떠나서 1834년 2월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837년 1월에 앵베르([范世亨], Imbert, Laurent Joseph Marie) 주교를 따라서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으로 들어아 모방([羅伯多祿], 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와 함께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기해박해]으로 샤스탕은 1839년에 참수당하였다.

활동 사항

1837년 1월에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은 조선어를 배우면서 포교 활동을 비롯해서 미사 및 성사 집전을 실시하였다. 1839년에 조만영이 안동 김씨 세력을 꺾기 위한 명분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실시하였을 때, 앵베르 주교가 조선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자수한다면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권하는 서신을 모방과 샤스탕에게 발송하였으며, 앵베르의 서신을 받은 샤스탕은 모방과 함께 9월 6일에 홍주목에서 자수하였다. 9월 21일에 샤스탕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그리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조선인 천주교인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당하였다(『헌종실록』 5년 8월 14일).

묘소

샤스탕의 유해는 참수형 이후 길에 약 20일 방치되었다가 조선인 천주교인에 의해서 노고산에 묻혔다. 샤스탕의 유해는 1843년에 경기도 과천의 삼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지금의 명동 대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그로토로 이장되었다. 샤스탕의 시신 일부는 절두산 순교성지에도 안치되어 있다.

상훈 및 추모

1925년, 교황 피우스(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 추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 추대

참고문헌

  • 아드리앙 로네, 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하, 가톨릭출판사, 2013.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저, 『한국 가톨릭 대사전』 1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시복재판기록』,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 김규성, 「19세기 전·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2, 2015.
  • 파리외방전교회 아카이브, No. 363, Jacques Honoré CHASTAN (http://archives.mepasie.org/notices/notices-biographiques/chas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