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합(正始閤)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희궁의 편전인 흥정당의 서편 행랑.

개설

정시합(正始閤)은 본래 흥정당(興政堂)의 서편 행랑이었으나, 영조가 정시합이라 이름을 짓고 신하들을 인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궁궐지(宮闕志)』에 수록된 「정시합지신인견시작병서(正始閤知申引見時作幷序)」에 ‘정시합’이라는 건물명이 갖는 의미가 기록되었다. 이 글은 영조가 정시합에 앉아 있을 때 일어난 감상을 도승지(都承旨)를 불러 쓰게 한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한 정시합을 보며, 처음이 바르지 않은데 그 끝이 바를 수 없듯이 백성을 다스림에도 처음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기록하고 세자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다. 정시합을 신하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한 것은 처음을 바로 세우려는 영조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정시합은 흥정당의 서쪽에 남향으로 자리하였다. 본래는 흥정당의 서편 행랑이었으나, 영조대에 신하를 만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검소한 왕이었던 영조는 편전인 흥정당 가까운 곳에 작은 규모로 정연한 모습을 갖춘 정시합을 인견의 장소로 편안하게 사용하고자 하였다.

정시합의 남쪽에 광명문(廣明門)이 있으며, 이를 지나 흥정당의 서행각에 위치한 금요문(金耀門)을 들어서면 흥정당 앞마당으로 통한다. 북쪽에는 영선당(永善堂)이 있으며, 서쪽에는 가파른 경사 위에 숭정전(崇政殿)이 있다.

변천 및 현황

1620년(광해군 12)에 경희궁이 완공되었을 당시 흥정당의 서편에 행랑으로 건립되었으며, 영조대에 이르러 정시합이라 하고 왕의 인견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1829년(순조 29) 10월에 회상전(會祥殿)에서 화재가 일어나 융복전(隆福殿)과 집경당(集慶堂), 흥정당, 사현합(思賢閤), 정시합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화재 직후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1831년(순조 31) 4월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에 관한 기록이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로 남겨졌다. 19세기 말에 경희궁이 궁궐로 활용되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었는데, 정시합도 이 무렵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