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번전(停番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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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의 입번을 정지시키는 대신 받는 돈.

내용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는 중종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신역 대신 군포를 거두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대부분의 양인 농민들이 군포 납부로서 의무를 수행하였으나, 그대로 실역에 복무하는 군인들도 남아 있었다. 이들은 번갈아 가며 소속 군영에 복무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전염병이 만연하거나, 흉년이나 군량 부족, 재정 충당 등을 이유로 상번군의 입번(入番)을 면제해 주는 정번(停番)의 조치가 많이 취해졌다.

18세기 말의 화성(華城) 축성역은 모군 등 고용 인부의 품삯을 중심으로 870,000냥의 경비가 소모되었던 대역사였다. 여기에는 우선 330,000냥 남짓의 금위영·어영청의 정번전(停番錢)이 투입되었다. 당시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군인들은 용병(傭兵)이 아닌 양인 상번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평상시에 목면 1필이나 쌀 6말(斗), 혹은 그 대전(代錢)을 부담함으로써 실역 복무를 대신 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곧 정번전이라 하였다. 이러한 두 군영의 정번전 10년분이 한꺼번에 화성 축성역의 재원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정번전이 토목공사의 품삯을 치르는 재원으로 전용된 예는 1830년(순조 30)의 경희궁(慶熙宮) 영건역(營建役)에서도 발견되었다. 당시 호조 판서조만영(趙萬永)은,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2년 뒤인 1832년(순조 32)부터 3년간의 정번 조치를 통하여 거두어들일 수 있는 보전(保錢)을 옮겨 쓰자고 제안하였는데, 그대로 실현되었다. 3년간 금위영·어영청의 정번전으로 각 60,000냥씩 요미 대전으로 각 12,000냥씩 도합 144,000냥을 끌어 쓸 수 있었는데, 이 중 두 영의 정번으로 인한 추가 지출분을 뺀 액수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정번전은 그 뒤 1833년(순조 33)의 창경궁 영건역 및 1834년(순조 34)의 창덕궁 영건역에서도 장인 및 모군의 품삯을 지불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몇 년간에 걸쳐 들어올 정번전을 미리 끌어다 쓰기 위해서, 호조 및 선혜청의 비축분인 봉부동전(封不動錢)을 미리 지출하고 뒤에 정번전을 걷는 대로 채워 넣는 방식을 취하였다. 19세기 초엽 순조대부터 재정상의 필요성에 따른 금위영·어영청의 정번 조치가 본격화되었다. 정번전의 가장 중요한 지출 용도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토목공사를 위한 모군의 품삯이었다. 그 밖에 진휼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정번전을 거둔 경우도 있었다.

용례

召見領中樞府事蔡濟恭 備邊司堂上鄭民始 沈頣之 尹行恁 趙心泰 上謂濟恭曰 水原築城之役 卿居留時 有所經紀 而間因拜相 未免中止 予則以爲限十年可以告訖 而若監董得人 則何必拖至十年 凡事莫如先定規模 規模莫如預爲經紀 經紀又莫如得其人 今日特召卿等者 此也 木石財力 予意本不意煩費經用 若以禁御兩營停番軍錢取用 則於公於私 少無所礙 卿等以爲何如 濟恭曰 凡係本府事 必欲不煩經費之聖意 臣等之常所欽仰者 停番錢取用 果極便好 上問停番錢當爲幾緡 心泰曰 一年當爲二萬餘兩 限計十年 則爲二十五萬兩 (하략) (『정조실록』 17년 12월 6일)

참고문헌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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