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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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정조 11) 서울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 일이 폭로된 사건.

개설

1787년 겨울에 진사 이승훈(李承薰)이 처남 정약용(丁若鏞), 강이원(姜履元) 등과 함께 성균관 앞의 반촌(泮村)에서 변려문 공부를 핑계로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였다. 이때 그들의 친우 이기경(李基慶)이 그 자리에 왔다가 모임의 본질을 파악하고는 이를 금지시키려 하였고, 강이원은 자리를 뛰쳐나가 모든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 또 홍낙안(洪樂安)은 이듬해 1월 정조에게 올리는 책문(策文)을 통해 은연중에 반회사(泮會事)를 폭로하였다.

역사적 배경

이승훈·정약용과 이기경·홍낙안은 같은 남인의 소장 학자로 일찍부터 교분을 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자가 일찍부터 서학서(西學書)를 가까이하거나 천주교회의 창설을 주도한 데 반해 후자는 이를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1785년(정조 9) 봄에 을사추조지옥(乙巳秋曹之獄)이 일어나면서 기호남인 안에서는 전통 유학을 따르는 안정복(安鼎福) 계열과 진보적인 성향 아래 천주교를 가까이하는 권철신(權哲身) 계열이 분파되었다.

발단

을사추조지옥 이후 위축되었던 천주교 신자들의 활동은 곧 재개되었다. 이승훈은 다시 교회 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정약전(丁若銓)·정약용 형제도 이를 도왔다. 그리고 다음해 겨울 이승훈과 처남 정약용은 친우 강이원과 함께 있던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石太)의 집에서 변려문을 핑계로 삼고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경과

반회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뒤늦게 소식을 듣고 모임에 참석한 이기경은 즉시 모임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천주교 서적을 학습하는 동료들을 만류하였다. 그러자 강이원이 밖으로 나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 사실은 홍낙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홍낙안은 강이원과 이기경에게 소문을 확인한 뒤 강경한 척사론을 폈는데, 이기경은 친구들을 공격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우선 권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홍낙안은 다음해 1월 정조에게 올린 책문을 통해 1785년의 을사추조지옥과 천주교 서적 전래 사실을 언급하고, 1787년의 반회사를 은연중에 폭로하면서 이승훈·정약용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정학을 바로 세우고 이단을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펴서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은 온건한 척사론을 펴면서 이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다.

의의

정미반회사는 남인 안에서 이기경·홍낙안과 같은 공서계(攻西系)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이들은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하여 이승훈·정약용 등 친서계(親西系) 인물들과 대립했으며, 이는 정치적으로 기호남인의 분열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론계의 척사론을 자극하고, 정조가 다시 한 번 서학서 반입 금지령을 내리는 계기도 되었다.

참고문헌

  • 『벽위편(闢衛編)』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8.
  •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