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모련위(征毛憐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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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 신숙주가 북방 두만강 지역의 모련위 일대를 정벌한 사건.

개설

세조가 모련위(毛憐衛) 정벌을 처음 구체적으로 지시했던 것은 1460년(세조 6) 3월이었다. 당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양정(楊汀)은 7~8명의 여진인들이 함경도 부령(富寧) 석막리(石幕里)를 공격해 거주하던 백성 한 명을 죽였다는 내용을 조정에 보고했다. 이에 세조는 신숙주와 의논해서 정벌을 결정했다. 조선은 정벌 준비에 힘썼다. 하지만 여진 문제에 관한 명과의 대립으로 계획대로 정벌을 시행하지 못했다.

세조는 논의 끝에 신숙주에게 출병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사를 파악하고 모련위 정벌군을 출동시켰다. 결국 신숙주는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모련위 일대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다. 신숙주는 정벌군이 출동했던 일주일 후 정벌의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정벌을 통해 죽인 자가 430여 명이었고, 불태운 집이 대략 900여 채였다. 아울러 말과 소 1천여 마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는 전과가 조정에 알려졌다. 세조는 결과를 보고받고 크게 기뻐하며, 종묘에 나아가 북방을 평정한 일을 알리고 근정전에서 신료들의 축하를 받았다.

역사적 배경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부터 야인이 조선에 조회하고 교류하는 일을 적극 권장했다. 명은 조선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은 사신을 파견해 조선과 여진 세력 간의 통교를 문제 삼으며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조선은 명의 압박에 대해 최선을 다해 대응했다. 하지만 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했던 여진과의 교류 중지에 대한 지시는 거부했다. 조선은 사대(事大) 자체를 부정하거나 명과의 충돌을 불러올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했다. 그러면서도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의 대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명은 모련위 지역을 두고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립 양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대외정벌은 사전에 많은 준비와 고민을 해야만 한다.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가는 물론 왕의 권위에까지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정벌이라는 군사행동은 항상 이와 같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발단

모련위 정벌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조선의 낭발아한(浪孛兒罕) 부자 처형 사건이다. 낭발아한은 모련위에서 가장 유력한 추장이었다. 그런데 낭발아한은 조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행동을 거듭했다. 더욱이 조선이 북방 정벌을 단행하려 할 때에 정보를 다른 세력들에게 제공하면서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조선은 처음부터 모련위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낭발아한과의 협상보다는 낭발아한 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여진 세력의 핵심 추장들을 제거하면서 조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결국 조선은 낭발아한 부자 등을 불러들여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낭발아한의 또 다른 아들 아비거(阿比車)는 복수를 위해 조선의 변경 지역을 공격해 왔다. 이는 조선이 1460년 모련위 정벌을 시행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아비거의 공격으로 발생했던 조선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 세조가 낭발아한 등을 제거하기 전까지 조선에 대한 여진 세력의 침입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서 본다면 아비거의 침입만으로 모련위 정벌이라는 대규모 외교 정책이 결정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조선은 자국의 외교적 목표에 따라 모련위 정벌을 준비해서 시행했다. 따라서 아비거의 침입은 정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조선은 아비거의 침입 이전부터 모련위에 대한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과

조선의 모련위 정벌군 중 길주목사(吉州牧使)오익창(吳益昌)은 800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박가비라(朴加非剌)·상동량(上東良) 등의 지역을 공격했다.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강순(康純)은 9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허수라(虛水剌)와 중동량(中東良)을 공격했다. 한편 양정은 세 장수와 병력 2,500명을 인솔하고 하동량(下東良)을 공격했다. 양정은 부하 장수들을 시켜 모련위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

정벌군 대장 신숙주는 4,000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1460년 음력 8월 27일 종성(鐘城)을 출발했다. 먼저 강효문(康孝文)에게 기병을 주어 하이란(河伊亂)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성부윤(漢城府尹)김사우(金師禹)와 북청부사(北靑府使) 조방림(趙邦霖)에게 상가하(常家下)를 공격하도록 했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김계손(金繼孫)은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김귀손(金貴孫)과 보리하(甫里下)를 공격하게 했다. 신숙주 자신은 홍윤성(洪允成)·이극배(李克培) 등의 장수와 2,000기(騎)를 데리고 아치랑귀(阿赤郞貴) 대천(大川)의 숲 좌우에 위치하고 있던 적을 공격하면서 신속하게 200리(약 78.5㎞)를 행군했다.

신숙주는 모련위로 출병했던 일주일 후 정벌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당시 조선의 모련위 정벌군은 잡아서 죽였던 적의 숫자가 430여 명이었고, 불태워 없앤 집이 900여 채에 달했다. 또한 소와 말 1천여 마리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세조실록』 6년 9월 11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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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영,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 을유문화사,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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