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사(典選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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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기무아문 소속으로 인재 등용과 각 관사에 필요한 물자 공급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전선사는 1880년(고종 17)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소속 관서이다. 인재 선발의 임무를 담당하였고, 임오군란으로 해체되었다가 통리군국사무아문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갑신정변으로 다시 해체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화·자강 정책을 추진할 목적으로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곧 전선사는 군국 기무와 외교 통상 문제를 총괄하는 정부 기관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은 의정부와 비견되면서도 왕과 측근 세력의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는 전선사를 포함하여 사대사(事大司)·교린사(交隣司)·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군물사(軍物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이용사(理用司) 등 모두 12사(司)를 두었다. 이때 설치된 전선사는 개화·자강 정책 추진을 위한 인재 선발을 맡고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전선사는 인재를 선발하여 각 사에 등용하는 일 등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고종실록』 17년 12월 21일). 설립 당시 전선사는 각국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일을 맡던 어학사와 겸관이었으며, 당상관뿐만 아니라 실무 관료인 주사(主事)들도 겸직하였다.

참신한 인재 등용은 당시 개화·자강 정책을 추진하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당시 고종은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학행(學行)이 독실하고, 실무에 능하며, 기예(技藝)에 정밀하고 민첩하며, 현실 대처에 능숙하고, 병기를 잘 만들며, 산술에 능한 것 등이었다(『고종실록』 17년 5월 25일). 이렇게 천거된 인재 가운데 현실 대처 능력·병기 제작 능력·산술 능력 보유자가 통리기무아문에 등용되었다(『고종실록』 18년 2월 4일).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후 전선사는 이러한 인재들을 각 사에 배치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최초 12사로 출발했던 통리기무아문은 당장 관장할 업무가 없는 부서도 있었다.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 귀국한 11월, 조직의 효율성과 조사시찰단 조사(朝士)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12사의 2~3개를 합쳐서 모두 7사로 조정하였다. 그 결과 전선사는 어학사를 포괄하였다.

이후 임오군란을 거치면서 통리기무아문이 잠시 철폐되기도 했으나, 1882년 11월 외교 전체의 사무를 관장하는 통리아문(統理衙門)과 국내 정치 전체를 맡은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으로 분리·재구축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하여 4사를 두었다.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하고 6사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6사에는 전선사를 비롯하여 장내사(掌內司)·이용사(理用司)·군무사(軍務司)·감공사(監工司)·농상사(農商司) 등이 있었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의정부에 합부되면서 전선사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다만 전선사의 업무는 갑신정변 후 통리군국사무아문을 계승한 내무부(內務府)가 설립되면서 그 소속 관서 가운데 하나인 직제사(職制司)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구선희, 「개항기 관제 개혁을 통해 본 권력 구조의 변화」, 『한국사학보』12, 2002.
  • 전미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24·25,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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