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세(田三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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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토지에 부과된 전세·대동세·삼수미세.

개설

조선후기 토지에 부과되는 전결세의 기본 세목은 전세(田稅)·대동세(大同稅)·삼수미세(三手米稅)·결작(結作)·모량미(毛糧米)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전세·대동세·삼수미세이며, 이들을 전삼세(田三稅)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전세는 결당 4두(斗)를 거두었다. 전세에 대한 규정은 논일 경우 쌀로, 밭일 경우 콩[太]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과정에서는 논밭의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세로 거두어들인 쌀·콩은 다음 해 6월까지 경창(京倉)에 수납하도록 하였으며, 포(布)·돈(錢)으로 거둔 경우 충청도·전라도·황해도는 다음 해 3월까지, 경상도·강원도는 다음 해 4월까지 호조(戶曹)에 상납하도록 하였다.

조선전기의 전세는 세종대 제정된 공법(貢法), 즉 토지의 비옥도에 따르는 전분6등(田分六等)과 당년의 작황에 따르는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에 따라 1결당 최하 4두에서 최고 20두까지 징수하였다. 이 법은 매우 복잡하여 당시에도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6세기 이후에 들어와 크게 변하였다.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의 등급에 따라 연분을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1결당 4두 내지 6두을 징수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는 1634년(인조 12) 『속대전』에 법제화되어 수세액이 해마다 1결당 논은 쌀 4두, 밭은 콩 4두로 확정되었다. 이 영정법의 실시로 조선후기의 전세는 정액세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대동세는 대동법에 의하여 공물을 전세의 형태로 부과한 것이었다. 대동법에 의하면 토지 1결당 일정한 양의 쌀을 부과·납입하게 하거나 지역에 따라 포(布)·무명(木)·돈(錢)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때 토지에 부과된 양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랐으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 외에는 대체로 쌀 12두 정도였다. 그런데 산군(山郡)과 연읍(沿邑) 간에 쌀값이 차이가 난다든지 혹은 조창(漕倉)까지의 과다한 운반비로 실질적인 역(役)이 커지게 되는 점 등을 고려하여 쌀 외에도 포·무명으로 부과하거나, 잡곡 등으로의 대납(代納), 혹은 돈으로의 대전납(代錢納)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대동세는 중앙 상납분과 지방 유치분으로 나뉘었다. 지방 유치의 사용 내역은 곳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지방의 경비와 상납 물종의 수송비로 사용되었다. 이는 종전에는 지방 관료의 봉급·요역·잡세(운송비 포함)로 설정된 것이었다. 대동법 이후 지방 유치분은 병선(兵船)의 개조(改造)·개삭(改槊), 특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방물진상(方物進上), 사신(使臣)이나 관찰사(觀察使) 접대 비용[使客支供], 그 밖의 비용 등에 활용되었다. 또한 그 나머지는 규정 외로 부과되는 각종 역의 대비재원[科外別役責應之資]으로 보관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중앙 상납분은 점차 증가하고 지방 유치분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삼수미는 1593년(선조 26)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며, 훈련도감에 소속된 삼수병, 즉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를 양성할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신설된 세목이었다. 호조가 이를 주관하였고,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6도에서는 1결당 쌀 2두 2승(升)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1634년(인조 12) 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1두를 감하여 1두 2승을 수납하게 하고, 경기도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면제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삼수미는 각종 면세전(免稅田)에도 부과 징수하도록 하였다. 삼수미는 태미(太米) 또는 전미(田米)를 수납하도록 하였으나 황해도에는 별수미(別收米)라는 명목으로 1결당 쌀 3두를 더 거두었다.

변천

삼수미와 대동세는 논밭 구분 없이 같은 양의 부담을 지지만 전세는 논과 밭의 부담 내용이 달랐다. 즉, 논은 쌀로, 밭은 황두(黃豆)를 내도록 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대개는 논과 밭을 구별하지 않고 결세(結稅)를 책정하여 같은 양의 부담을 지게 하였다. 또한 위태와 조세로 내는 콩 세태(稅太) 모두 콩 2석(石)을 쌀 1석으로 환산하여 상납할 수 있게 한 규정을 악용하여, 밭에서도 논과 같은 양의 쌀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각종 전결세를 현물이 아닌 화폐로 징수할 때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콩의 값[太價]과 쌀값[米價]을 같은 액수로 징수하기도 하였으며, 각 군현에서 결가(結價)를 책정할 때에 논과 밭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백성의 저항을 야기하였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전반 충청도 서원현(西原縣)에서는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8결을 단위로 경작지를 묶어 1부(夫)로 하되, 1부 내의 논과 밭을 각각 6결, 2결로 고정시켜 그 비율을 일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 경작지를 부(夫) 단위로 묶는 과정에서는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2: 조선 후기의 정치』, 국사편찬위원회, 1997.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 정선남, 「18·19세기 전결세의 수취 제도와 그 운영」, 『한국사론』 22,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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