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全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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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의 조개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에는 복어(鰒魚) 혹은 전복어(全鰒魚)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전복은 깊은 바다 속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채취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조선시대에 전복의 주산지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이었는데, 이곳 백성들은 전복을 봉진(封進)하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복은 대개 말린 상태로 공납하였다. 생전복은 생복(生鰒)·생포(生鮑) 혹은 전포(全鮑)라고 하였는데, 주로 회나 죽을 만드는 데 쓰였다. 반면에 말린 건복(乾鰒)이나 삶은 숙복(熟鰒)으로는 찜·탕·구이·조림·초·포 등을 만들어 먹었다.

원산지 및 유통

전복은 남해안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라도 영암·강진·순천·제주도 지역과 강원도 강릉·양양·삼척·울진 지역에서 진상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담당한 곳은 제주도였다. 이곳 백성들은 전복을 진상하느라 조선시대 내내 큰 고통을 겪었는데, 『포저집(浦渚集)』에 의하면 제주도 백성들이 봉진할 전복을 따다가 죽거나 전복을 더 구매하라는 명이 내려오면 아예 목을 매어 죽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제주도의 어려운 실정을 헤아려 공납을 감하거나 감면해 주었지만, 전복 수요가 워낙 많다 보니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이었다(『숙종실록』 42년 5월 10일)(『영조실록』 30년 윤4월 19일).

전복은 대·중·소로 구분하여 징수하였는데, 특히 대전복은 수량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다(『중종실록』 13년 3월 9일). 전복은 산 것과 말린 것을 모두 진상하였지만, 생복의 경우는 도중에 상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영조대에는 봉진한 전복이 상해서 통제사(統制使)이한응(李漢膺)이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4년 9월 6일). 그러다 보니 생복보다는 대개 말린 건복이나 삶은 숙복의 상태로 유통하였다.

국내에서 전복 양식에 성공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처음에는 어린 전복을 생산한 후 바다에 뿌리는 방식으로 전복 양식을 하다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가두리 양식에 성공한 뒤로는 이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전복 양식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은 전라남도 완도군이다. 완도는 물이 맑고, 수온이 섭씨 7~28도 정도로 적당하여 전복을 양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복의 먹이로 쓰이는 미역과 다시마가 매우 풍부한 지역이다. 이처럼 완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복 양식에 성공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전복의 주생산지였던 제주도에서조차 쉽게 먹을 수 없었던 전복을 이제는 일반 가정에서도 손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연원 및 용도

전복은 한자어로 복(鰒) 혹은 포(鮑)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석결명(石決明), 천리공(千里孔), 구공라(九孔螺)와 같은 전복의 별칭(別稱)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전복은 왕실에서 소비되는 것 이상으로 꽤 많은 양을 중국에 봉헌하였다.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중국 사람들이 전복을 매우 귀히 여긴다고 하였고, 정약전(丁若銓)도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중국은 전복 생산량이 매우 적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실제로 중국은 조선 조정에 끊임없이 전복을 요구해 왔고, 때로는 황제가 직접 전복을 진헌 물품으로 요구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9년 8월 13일). 조정에서는 적복(摘鰒)하느라 고생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뻔히 알면서도, 칙서에 전복이 열거되어 있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성종실록』 13년 1월 14일). 조선에 온 중국의 사신들 또한 선물 물목으로 전복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귀한 식재료였던 만큼, 전복은 조선시대 문헌과 조리서에서 다양한 음식으로 등장한다. 정약전은 전복의 살코기는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방법이라고 소개하였다. 또한 전복의 장은 익혀 먹어도 좋고, 젓갈을 담아 먹어도 좋으며, 종기 치료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전복은 크기와 굵기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되는데, 대전복은 넓고 두껍게 저며서 구이를 만들어 먹거나 얇게 썰어 만두를 빚어 먹었다. 그리고 회·죽·포·초·젓갈 등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하였고, 전복의 배를 갈라 볶은 양념을 넣고 실로 동여맨 다음 찜을 해 먹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복초는 궁중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던 음식으로, 고종 재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연회를 기록한 1902년(광무 6) 진연의궤에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런데 왕의 음식상과 연회를 책임진 전선사(典膳司)에서 장선(掌膳) 직책을 맡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3년(광무 7)에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을 개업하면서 궁중 잔치에 올랐던 전복초를 명월관 메뉴로 편입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졌다. 방신영(方信榮)의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 의하면, 전복초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른 전복을 잘 불린 후 작은 것은 통째로, 굵은 것은 어린아이 손가락만큼씩 얇게 저며서 간장·기름·꿀과 잘게 다진 고기 등을 넣는다. 그런 다음, 양념과 물을 약간 붓고 아주 약한 불로 오랫동안 조려서 만든다.

전복젓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전복 살과 내장을 분리한 후, 전복 내장에서 먹지 못하는 부분을 제거한다. 그런 다음, 내장에 소금을 넣고 버무려 10~15일 동안 숙성시킨다. 숙성이 되면 꺼내어 잘게 썬 다음, 양념을 버무려 낸다.

이외에 전복은 김치나 다식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의하면, 전복김치는 전복을 얇게 저며 주머니처럼 만들고 그 안에 가늘게 채 썬 유자 껍질과 배를 넣은 다음, 파·생강과 나박 썰기 한 무를 넣고 소금물을 부어 익힌 것이다. 전복다식은 전복가루를 젖은 헝겊으로 감싸 축축하게 한 다음 다식판에 박아 낸 것으로, 전복 맛을 살리면서도 두부처럼 부드러워서 이가 없는 노인들이 먹기에 좋은 음식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규합총서(閨閤叢書)』
  • 『산림경제(山林經濟)』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자산어보(玆山魚譜)』
  •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 『포저집(浦渚集)』
  • 주영하, 「전복초가 요리옥 식탁에 오르기까지」, 『식탁 위의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3.
  • 최진옥, 「왕실에서 보내준 먹거리」, 『조선 백성의 밥상』, Holly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