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全羅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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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주에 설치되어 전라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

개설

전라감영(全羅監營)은 1402년(태종 2) 이후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으로 감사(監司)가 있는 영문(營門)이라는 뜻에서 전라감영으로 불렸다. 전라도관찰사는 전라도 지역의 행정은 물론이고 군사와 사법, 치안에 이르기까지 왕을 대신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폐지되었으며, 이후에도 관찰사라는 직명(職名)은 사용하였으나 권한은 전과 달리 행정 분야에 국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라감영을 설치한 시기는 1402년 이후로 추정된다. 안렴사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은 것으로 임기 동안 순행(巡行) 구역을 계속해서 안찰(按察)하다가 귀경하는 봉명사신(奉命使臣)이었다. 그래서 안렴사에게는 감영 같은 행정 관청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태조대에는 안렴사와 관찰사를 번갈아 파견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감영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조대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파견한 적이 있지만, 1401년(태종 1)에 안렴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1402년에 도관찰출척사로 바뀌었다(『태종실록』 2년 1월 20일). 이후에 전라감영이 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영은 그 지역의 행정 책임자가 단순한 순찰과 관찰 기능을 넘어서, 지역의 병마와 수군을 지휘하는 기능까지 모두 수행하는 데 필요한 행정 관청이었다. 평안·함경도에 파견되는 관찰사와 달리 전라도관찰사에게는 원칙적으로 가족을 데려가는 솔권(率眷)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1594년(선조 27)에 전라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을 겸한 홍세공(洪世恭)처럼 구임(久任)할 수 있게 솔권이 허락된 적도 있었다(『선조실록』 27년 5월 28일). 전라감영이 설치됨으로써 관찰사가 그곳에서 고정적으로 행정 사무를 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전라도관찰사는 종2품 관직이었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문신으로 임용하는 관직으로 간주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문과 급제자를 임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관찰사의 임기는 360일 즉 1년이었다. 그 뒤 변화가 있었는데, 1669년(현종 10)에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하였다가, 1677년(숙종 3)에 다시 1년으로 정하였다(『숙종실록』 3년 1월 10일).

전라도관찰사의 역할은 전라도 지역의 행정·군사·사법·치안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있었다. 감영의 인적 구성을 보면 먼저 관찰사를 보좌하는 수석 보좌관인 수령관(首領官)으로 종4품인 경력(經歷) 또는 종5품의 도사(都事)가 있었다. 그 밖에 종5품 판관(判官)과 종6품 교수(敎授)가 감사를 보좌하였으며, 종9품인 훈도(訓導)·심약(審藥)·검률(檢律)을 각각 1명씩 두었다. 그 밖에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영리(營吏)와 천역(賤役)을 지는 영노비(營奴婢) 등이 있었다.

경력은 『경국대전』 간행 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도사는 19세기 말까지 관찰사를 수행하였다. 도사는 불법을 저지른 자를 추국하고, 관찰사와 함께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정하였으며, 관찰사 유고 시에는 그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도사는 관찰사의 보좌관이면서도 관찰사와 수령의 불법을 규찰하여 왕에게 직접 보고하거나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도사를 관찰사에 이어 두 번째라는 뜻으로 아사(亞使)라 불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성종실록』 4년 11월 8일) (『성종실록』 4년 11월 9일). 그런데 18세기 말 이후에 도사는 관찰사의 하급관리로 전락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의 군사 업무를 보좌하는 감영의 중군(中軍)은 정3품 당상 무관이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한 뒤 감영과 병영에도 중군직을 설치하였다. 순영중군(巡營中軍)으로 불린 감영의 중군은 관찰사의 군무를 보좌할 뿐만 아니라, 관찰사의 직속 부대인 순영속아병(巡營屬牙兵)을 총지휘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전라도 순영속아병의 군사 조직을 보면, 최고 지휘관인 중군 아래 마병별대(馬兵別隊) 12초(哨), 3부와 6사의 군대 30초로 편성되었다. 순영중군은 휘하에 마병별장(馬兵別將)과 천총(千摠) 3명, 파총(把摠) 6명, 초관(哨官) 42명을 거느렸다.

변천

전라도의 도역(道域)은 고려시대에 확정된 뒤 1890년대까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전라감영도 전주(全州)에 설치된 이래 바뀌지 않았다. 다만 도명(道名)은 변화가 있었다.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를 합하여 전라도라 한 것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645년(인조 23)에는 나주의 주리(州吏)가 목사(牧使)를 칼로 찔러 상해를 입힌 일로 나주를 금성현(錦城縣)으로 읍호를 강등시키고, 도의 명칭을 전남도(全南道)로 바꾸었다(『인조실록』 23년 7월 11일). 1654년(효종 5)에 금성군을 나주목으로 승격하면서 전남도를 원래대로 전라도라 했다. 1728년(영조 4)에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나주의 읍호를 낮추어 금성현으로 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1735년(영조 11)에는 전라도를 전광도(全光道)로 바꾸었다. 1738년(영조 14)에 전라도의 명칭이 회복되었다(『영조실록』 11년 5월 1일) (『영조실록』 14년 1월 11일).

『완영일록(完營日錄)』에 따르면 전라도 감영에는 800명이 넘는 관속(官屬)이 속해 있었다. 솔대군관(帶率軍官) 7원, 사자군관(寫字軍官) 1원, 화사군관(畫師軍官) 1원, 재가병방(在家兵房) 2원, 재가군관(在家軍官) 200원, 별병방(別兵房) 2원, 별군관(別軍官) 200원, 영리 30원, 계서(啓書) 6원, 마두(馬頭) 3원, 속영리(屬營吏) 110원, 지인(知印) 39원, 사령(使令) 38원, 군뢰(軍牢) 115원, 순령수(巡令手) 30원, 기생(妓生) 31원, 영노(營奴) 41원, 영비(營婢) 13원이 관찰사의 관속이었다. 한편 도사에게 할당된 관속은 2명에 불과해서 영리 1원과 마두 1원이었다. 이는 중군(中軍)에게 200명이 넘는 관속이 배정된 것과 대조적이다. 병방(兵房) 2원, 군관(軍官) 200원, 군색(軍色) 2원, 마두 1원, 지인 9원, 군뢰 1쌍, 사령 2쌍이 중군이 가진 군속이었다.

전라감영은 1895년에 친일내각의 내부 대신박영효(朴泳孝)가 주도한 지방제도 개혁 때 폐지되었다.

1895년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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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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