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권대신(全權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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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의 공법 질서하에서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국가의 대표 자격으로 임명되던 사절의 수장.

개설

조선 정부는 1876년(고종 13)에 강화도조약을 통해 개항을 강요받으면서 국제 외교상 전권대신(全權大臣)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알았다. 1882년(고종 19) 7월 19일에 봉조하(奉朝賀)이유원(李裕元)을 전권대신에 임명할 때 국가 간 조약을 의논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지위와 명망이 높고 시무(時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직임을 맡아야 하며 건강한 사람이 적임이라고 하였다(『고종실록』 19년 7월 19일). 당시 이유원은 임오군란의 해결을 위해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 및 조일수교조규(朝日修交條規)의 속약(續約)을 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외교에서는 왕에게 각각의 사안을 보고한 뒤 재가받는 절차를 취하였으나, 전권대신이 만들어진 뒤에는 그가 이름을 기입하고 도장을 찍음으로써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었고, 조약의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유원은 임오군란에 대해 일본국에 사과하는 것과 배상 문제에 합의하였고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같이 조인하였다. 특히 개항장에만 거주가 허용되던 일본인이 100리, 약 39㎞ 밖까지 활동할 수 있도록 합의하여 전권대신의 결정에 따라 국익의 향방이 좌우됨을 보여주었다. 이때 전권부관(全權副官)은 김홍집이었다(『고종실록』 19년 7월 17일).

내용 및 특징

조선 최초의 전권대신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던 신헌(申櫶)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전권대신의 직함을 지니지 않았으나 일본 측 전권대신을 상대한 만큼 동일한 지위에서 일을 진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76년 1월 일본의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는 강화도의 연무당(鍊武堂)에서 한국 측 대표인 신헌과 회견하였다. 구로다는 변경을 책임진 신하가 그저 종전의 관례만 지키다가 오늘과 같은 불화가 생겼다고 하였다. 또한 두 나라의 대신이 직접 만나서 토의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신헌은 조선에는 전권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며 자신은 그저 접견하러 왔으니 제기되는 일을 보고하여 명령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구로다는 두 대신이 면담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수행원들을 시켜 서로 통지하는 것이며, 수행원들은 각기 명을 따를 직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헌은 자신의 수행원들은 왕의 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임의로 데려온 사람들이라고 하여 회담 상대방 간에 큰 격차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시각차로 말미암아 강화도조약이 조선에 불리한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조인했다고 할 수 있다(『고종실록』 13년 1월 19일).

신헌과 구로다는 2월 2일자로 양국 간의 수호조규를 체결했다. 당시 조문의 제1조에는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하여 조선이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근대 외교 문안에 표현하였다. 또한 일본이 수시로 사신을 한양에 파견하여 직접 예조 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고 하여 기존의 교린 체제를 완전히 폐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고종은 조항마다 타당하므로 비준한다고 했다. 일본 천황은 흠명(欽命) 전권대신이 조선의 전권대신을 만나 체결한 조관이라면서 비준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볼 때, 당시 신헌이 조선 정부로부터 전권대신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업무 수행은 전권대신과 동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종실록』 13년 2월 3일).

조선 정부는 일본과 수교한 경험으로 인해 1882년에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신헌에게 전권대관(全權大官)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의 직함을 주었다. 신헌은 미국의 전권대신 슈펠트([薛裴爾], Shufeldt, R.W.) 제독과 조미조약(朝美條約)을 체결하였다. 당시 두 사람은 상대의 전권위임신임장을 상호 검열한 뒤 조약의 세부 항목을 작성하였다. 특히 통상우호조약(通商友好條約)을 맺은 뒤 양국이 병권대신(秉權大臣)을 위임하여 피차의 수도에 주재시키며, 통상 항구에 영사(領事) 등의 관리를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다만 조선이 미국과 국제공법에 따라 조인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양국의 조약문에 ‘광서(光緖)’라는 청국 연호를 사용하여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암시하였으며, 한글이 아닌 중문[華文]과 영문으로만 문서를 작성하였다(『고종실록』 19년 4월 6일).

변천

전권대신은 다양한 직무를 병행하기도 하였고, 그 목적성에 부가되는 명함을 받기도 했다. 1882년 8월 8일 박영효는 일본에 파견되면서 전권대신 겸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었다(『고종실록』 19년 8월 8일). 또한 외국에서 공사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였다. 1888년(고종 25) 미국에 주재하던 참찬관(參贊官)이완용은 전권대신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였다(『고종실록』 25년 7월 27일). 1902년 외부의 유기환(兪箕煥)은 의약전권대신(議約全權大臣)의 임무를 지니고 덴마크국[丹國] 전권대신과 조약을 협의하였다(『고종실록』 39년 6월 2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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