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자(賫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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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에 자문의 전달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소규모 사행.

개설

재자행은 중국의 관청에 자문과 같은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회답 문서를 접수하여 돌아오는 소규모의 사행이었다. 조공 체제에서 문서왕래의 종결을 의미하는 사행이며, 수시로 파견되어 중국의 외교 정보를 수집하였던 사행이었다. 사행은 북경까지 가는 경우와 요동까지 가는 경우로 구분되며, 규모는 작지만 외교 절차는 정식 사행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대표적인 대중국 외교문서는 자문이었으며, 자문의 전달은 절행과 별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식 사행 이외에 실무 외교 관원을 파견하여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외교 목적을 기재한 자문을 예부나 요동과 같이 중국의 담당 관청에 전달함으로써 조선의 외교 목적을 달성하는 소규모의 사행을 재자행(賫咨行)이라 하였다. 재자행은 규모에 있어 정사·부사 등의 품관사신(品官使臣)을 갖추지 않고, 재자관이라 하여 자문을 해당 관청에 전달하는 봉명사신과 수행원만으로 구성되었다. 재자관은 명대에는 일반 관원에서 차정하였으나, 청대에는 문서 전달 및 중국 관원과의 전대(專對)하는 능력이 구비된 역관을 차정하였다. 사행 규모 면에서 북경까지 가는 부경사행보다 작았지만, 하급 통사와 마두(馬頭)·노자 등을 모두 갖추었으며, 선문(先文)·수본(手本)·입책(入柵)·하정(下程)·자문정납(咨文呈納)·고시(告示)·반상(領賞)·연향(宴享)·자문수납(咨文受納)·신표수령(信票受領) 등 부경사행의 절차와 유사하였다.

재자행이 파견되는 경우는 첫째, 자문이나 주문 등 외교문서를 신속하게 중국에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파견되었다. 성절사·사은사 등의 사행이 북경에서 선래통사를 통하여 추가 외교문서의 전달을 요청해 오면 신속하게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재자행을 통하여 북경으로 전달하였다.

둘째, 역서(曆書)의 수령 등과 같은 정례적인 경우에 파견되었다. 역서를 수령하는 경우에는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이라 하였다.

셋째, 작은 외교 사안에 대하여 파견되었다. 정식 사신을 파견하여 북경에서 외교 관련 의례를 수반할 정도의 외교 사안에 대해서는 주청사행(奏請使行)을 파견하고, 사안이 작아 조선에서 가까운 요동(청대에는 성경)에 주문의 전달만으로 외교 목적이 달성되면 재주행(賫奏行)을 선별적으로 파견하였다.

넷째, 중국 자문에 대한 회답 자문의 전달이 필요할 경우 파견하였다. 조선에서 표문과 주문 등 외교문서를 중국에 보내면 황제의 성지(聖旨)를 담은 자문을 접수하고, 이에 대한 사은하는 표문이나 자문을 전달하면, 표문이나 자문을 접수하였다는 자문을 다시 접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중국 자문을 잘 접수하였다는 자문을 전달할 때, 재자행을 파견하였다.

재자행은 자문의 전달이 기본 임무였지만, 정보 수집의 임무도 있었다. 조선은 중국의 외교 정보, 군사 정보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수시로 재자행을 파견하여 사소한 자문을 요동도사나 성경에 전달하는 명분으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때 파견되는 재자관은 주로 언어적인 능력을 겸비한 역관이 주로 활용되었다. 재자행의 목적지는 북경, 명대에는 요동도사, 청대에는 성경, 기타 조선에서 외교문서를 발급하여 실무적인 교류를 하였던 봉황성 등 다양하였다. 또한 최종 목적지가 중국의 지방인 경우도 있었다. 조선초기에 요동 주변의 진왕부(秦王府)에 자문을 전달할 경우에도 재자관을 파견하였다(『태조실록』 2년 4월 17일).

의의

수시로 파견되는 재자행은 조선의 대중국 외교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며, 조·중 관계에 대한 조선의 외교 활동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김경록, 「명대 공문제도와 행이체계」, 『명청사연구』 26, 2006.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 김경록, 「조선후기 사대문서의 종류와 성격」, 『한국문화』 35,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