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새(宰賽)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7세기 초 몽골 남할하의 홍기라드 부 수령.

개설

재새(宰賽)는 몽골어 자이사이(Jayisai)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자이사이는 17세기 초 몽골 남할하의 홍기라드([弘吉剌], qonggirad) 부 수령으로 다얀 칸의 5대 손자이다. 다얀 칸의 다섯째 아들인 알추볼드(Alčubolud)는 남할하의 다섯 오톡([營], otoγ)을 상속받았으며 그의 맏아들 호르가치 하사르 노얀(Qurγači qasar noyan)은 다섯 오톡 중 홍기라드를 분봉하였다.

가계

조부는 부이마 독신 노얀(Buyim-a doγsin noyan), 부는 키타드 홍타이지(Kitad qungtayiji)이다. 처는 예헤(Yehe) 부 수령인 깅타이시(gingtaisi)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자이사이는 호르가치 하사르 노얀의 증손으로 옛 복여위(福餘衛) 영지를 점거하였고 명나라와 통교하면서도 요동 변방을 침입하였다. 그는 1605년에는 명나라 변방을 침입하여 경운보수어(慶雲堡守禦)웅약(熊鑰)을 죽였다. 1619년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 철령(鐵嶺)을 공격하자 명나라 군대를 원조하러 남할하 자루드(Jarud) 부의 박(Baγ), 바야르트 다이칭(Bayartu dayičing), 세분(Sebün) 등과 20여 명의 타이지(tayiji)의 10,000군대를 이끌고 왔다. 만주 군대와 싸웠지만 패배하여 자기 아들 세트겔(Sedkil)·히식트(Kisigtü) 등 10여 명의 관리 및 150여 병사와 함께 누르하치에게 붙잡혔다. 누르하치는 오래지 않아 자이사이의 두 아들을 석방하였으며 1621년에 자이사이의 자식들이 부친을 위하여 소와 양을 10,000마리나 내놓자 자이사이도 석방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실록에서 자이사이가 확인되는데 “몽고의 장수 재새도 같은 해에 잡혀 왔는데, 지난달 소와 양을 10,000마리나 내놓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이에 앞서 1597년 여진의 예헤부 수령인 깅타이시가 자신의 딸과 누르하치의 아들 다이샨(Daishan)을 약혼시켰지만 파혼도 시키지 않은 채 자이사이에게 시집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자이사이와 누르하치 간에 원한이 생긴 듯하다.

자이사이는 누르하치에게 석방된 이후 1625년 차하르와 함께 누르하치의 동맹자인 몽골의 호르친 부를 공격하러 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후에도 누르하치와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 측 기록에 의하면 자이사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한 아하이(Qan aqai)와 보얀 아하이(Buyan aqai)는 북경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한(Qan)이란 칭호로 볼 때 그의 맏아들 지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Хөрвүүлсэн Ц. Цэрэндорж, Манжийн үнэн магад хууль, Бит пресс, 2009. (Ts. 체렝도르지 역주, 『만주실록(滿州實錄)』, 비트프레스, 2009.)
  • Дарма гүүш, Алтан хүрдэн мянган хигээст (다르마 구우시, 『금륜천복(金輪千輻)』)
  • Хөрвүүлсэн Ц. Цэрэндорж нар, Зарлигаар тогтоосон гадаад монгол, хотон аймгийн ван гүнгүүдийн илтгэл шастир, Согоо нуур, 2007. (Ts. 체렝도르지 등 역주,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소고오 누우르, 2007.)
  • Д. Гонгор, Халх товчоон, ШУА-ийн хэвлэх үйлдвэр, 1970. (D. 공고르,『할하의 약사』, 과학아카데미 출판사, 1970.)
  • Ц. Цэрэндорж, “Ар, өвөр, гадаад, дотоод Монгол хэмээх нэрийн тухай”, Нүүдэлчдийн өв судлал, №10, 2010. (Ts. 체렝도르지, 「북·남·외·내 몽골이란 명칭에 대하여」, 『유목민 유산 연구』 vol. 10, 몽골국립중앙박물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