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부(長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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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흥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인종 연간에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으며, 1265년(고려 원종 6)에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장흥부가 관할해 오던 5현과 6향 13소를 장흥부에 편입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1455년(세조 1)에 장흥이 전라도 흥양진(興陽鎭)의 우익을 맡았으며, 1457년(세조 3)에는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장흥진에 속했다. 1599년(선조 32)에 전라도 병영을 장흥부로 옮겼다가, 1604년(선조 37)에 지형이 불편하다 하여 원래대로 강진현에 설치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장흥부에 포군 5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장흥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고려 때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서 영암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인종 연간에 공예태후(恭睿太后)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로 승격시켰다. 1265년에 회주목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에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392년(태조 1)에 중령산(中寧山)에 성(城)을 쌓고 장흥부의 치소(治所)로 삼았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장흥부가 관할해 오던 5현과 6향 13소가 장흥부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413년에 도호부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흥부에 종3품 부사(府使) 1인과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장흥부사는 종3품 병마첨절제사를 겸하고 그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장흥부는 부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장흥부사는 장흥이 바다와 인접한 지역임을 감안하여 주로 무관을 임용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문신이 아닌 무과 출신자를 임명하여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장흥을 비롯하여 순천·보성·낙안·광양·강진·해남 같은 곳은 바다와 가까워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인데도 그곳 수령이 대부분 무신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명종대 이후에는 무과 출신자를 이 지역 수령으로 꾸준하게 파견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장흥을 비롯하여 순천·영광·강진·해남의 문관 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용하기로 하였다(『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1666년(현종 7)에는 장흥부사가 전라도 전영(前營)의 영장을 겸임하였다(『현종개수실록』 7년 2월 24일). 『증보문헌비고』에는 전라도의 병마첨절제사가 4원으로 되었는데, 장흥부사를 비롯하여 나주목사·남원부사·순천부사가 겸임하였다.

변천

1417년(태종 17)에 남쪽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병영을 광주목(光州牧)에서 강진현으로 옮겼다가 1599년에 다시 장흥부로 옮겼다. 1604년에 지형이 불편하다 하여 원래대로 강진현에 설치하였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장흥을 비롯하여 해남·강진을 전라도 흥양진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진이 설치되었는데 장흥도 그중 하나이다. 장흥진에는 보성·강진·해남·진도가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전부(前部)에는 장흥진관과 제주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5영(營)을 두고 각 군현을 배속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장흥부에 포군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장흥부가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장흥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장흥군지』, 장흥군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