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선(張致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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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30년(순조 30)~1868년(고종 5) = 39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거주지는 충청도 제천과 서울이다.

헌종~고종 시대 활동

충청도 제천 배론에서 성 요셉 신학교를 관리한 장주기(張周基)의 5촌 조카 장치선(張致善)은 5세 때 경기도 양지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성인이 된 뒤 허다한 경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고,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거의 대부분 만났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 살고 있을 때인 1866년(고종 3) 봄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베르뇌(Berneux) 주교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4월경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던 중 지자익(池子益)을 만나 그의 집에 갔다. 이때 지자익은 박해의 사정을 중국 상해(上海)의 프랑스인들에게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다가 남은 천주교인들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이런 사정을 들은 장치선은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연락의 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조철증(趙喆增)을 비롯한 서울의 신자들이 마련해 준 돈으로 작은 배 하나를 구입하였는데, 마침 조선의 박해소식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던 리델(Riddel) 신부를 만났다. 이들은 리델 신부가 제공한 돈으로 출항에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그해 양력 6월 충청도 신창 용당리 포구에서 리델 신부를 태워 중국으로 탈출시켰다.[『리델문서』]

그 후 중국에서 돌아온 장치선은 지자익을 찾아가 프랑스의 병선 몇 척이 오래지 않아 조선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고, 실제 그해 10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발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퇴각하고 있을 때인 양력 11월 12일 장치선은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용당리 포구에서 리델 신부가 승선하고 있던 프랑스 군함을 찾아가 병인박해의 진행 상황 등을 보고하였다. 이후 그 배를 타고 중국 상해로 간 장치선은 1년을 체류한 후 1867년(고종 4) 양력 8월 귀국하였다.

서울 백동(현 혜화동)의 양반집 행랑으로 이사한 장치선은 장사를 하며 새로운 신부의 영입을 준비하던 중 1868년(고종 5) 봄 체포되어 포도청에 끌려갔다.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심문을 받은 장치선은 자신의 모든 행적을 자백하였고, 그해 5월 22일 강화도 진무영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사망하였다.(『고종실록(高宗實錄)』 5년 4월 19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5년 4월 19일],(『고종실록』 5년 5월 22일),[『승정원일기』 고종 5년 5월 22일]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치명일기』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리델문서』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