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발(張至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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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관리로, 심하 전투 이후 조선을 감호하자는 주장을 편 인물.

개설

장지발은 심하전투(深河戰鬪,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에서 강홍립(姜弘立) 군대가 후금에 투항하고 그곳에 머물자, 조선과 후금의 연합을 우려하여 조선을 확실하게 장악해 후금 측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리시(大理寺) 승(丞), 예부시랑겸동각대학사(禮部侍郎兼東閣大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1638년에 치사하였다.

활동 사항

장지발은 산동(山東)성 치천(淄川)현 출신으로 1601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여러 곳의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1619년 3월 명나라는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赫圖阿拉], hetu ala) 공격에 나선 심하 전투에서 참패하고 강홍립이 거느린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투항을 하자, 명은 조선이 후금과 결탁하여 화친하여 명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러한 형세에 편승해 조선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후금 측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지발이었다.

장지발은 조선이 후금에 굴복할 경우 수군을 이용하여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엿보고 더 깊숙이 들어와 서주(徐州)·연주(兗州)까지 노릴 것으로 보았다. 또 산동과 회남(淮南)에서 강물을 따라 남하하여 조운하는 길을 막으면, 북경(北京)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자고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0월 3일). 이에 대하여 조선의 대제학이이첨(李爾瞻)은 조선이 후금과 원수 관계에 있고 우호 관계를 가질 뜻이 없다는 것으로 해명하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는 1621년에 대리시 승에, 1635년에는 예부시랑겸동각대학사에 제수되었다. 1638년 4월에 치사(致仕)하였다.

참고문헌

  • 『명사(明史)』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