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기원전 290년 경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장자(莊子)가 지은 책.

개설

『장자(莊子)』는 기원전 290년 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의 저서이다. 전문은 65,000여 자이며, 「내편(內篇)」 7편과 「외편(外篇)」 15편, 「잡편(雜篇)」 11편 등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주로 북송(北宋)의 임희일(林希逸)이 지은 주해서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로 『장자』를 접했다. 그러다가 박세당(朴世堂)의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편찬한 뒤로는 『장자권재구의』와 『남화경주해산보』가 『장자』 읽기의 표준 교재가 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 초기에는 조정에서 『장자』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세종실록』에 보면 1425년(세종 7) 주자소(鑄字所)에서 찍어낸 『장자(莊子)』를 문신(文臣)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7년 1월 17일) 이어 『세조실록』에도 1467년(세조 13) 세조가 선발한 문신들에게 『주역(周易)』 및 『장자』 등을 나누어주고, 기한을 정하여 다 읽게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세조실록』 13년 6월 22일) 이때에 나누어 준 『장자』는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이다.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기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집(思齋集)』「척언(摭言)」에서 “일찍이 『장자권재구의』를 보았더니[嘗見莊子鬳齋口義]”라고 서술하였으며, 홍여하(洪汝河)는 『목재집(木齋集)』「독서차기(讀書箚記)」에서도 “임희일이 주해한 장자[林希逸註莊子]”라고 서술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사가문집(四佳文集)』 보유(補遺)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에서 “남화경 10편의 글은 변화가 기굴하다[南華十篇書變化奇崛]”이라고 하였는데, ‘10편’은 ‘10권 10책’으로 간행된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를 가리킨다.

서지 사항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425년에 경자자(庚子字)로 간행된 소개된 『장자권재구의』 결본 1책이 남아 있다.

또한 1474년(성종 5)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영유(金永濡)의 주도로 간행한 『장자권재구의』에는 당시 함양군수(咸陽郡守)이던 김종직(金宗直)의 발문이 붙어 있다. 그 발문에는 “세종 임금 때에는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새로운 주해서를 구해 오면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찍어냈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 유행한 것은 대개 이때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나온 뒤로는 다시 찍지 않은 채 세월이 오래되어, 학사(學士)나 대부(大夫)의 집안에도 전하는 것이 드물다. 갑오년(1474년 : 성종 5)에 관찰사김영유가 이 책 한 본을 구해서 각 고을에 분담시켜 간행하게 하여 경주부에서 취합하게 하였다. 이에 『장자구의』를 사람마다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후학에게 끼친 그 은혜가 지극하다.”라고 하였다. 발문 뒤에는 간행을 분담했던 경상도 17개 고을의 이름과 지방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자권재구의』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개인 소장자도 다수 있다.

구성/내용

『장자』는 「내편」과 「외편」, 「잡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총 7편으로 「소요유(逍遙遊)」ㆍ「제물론(齊物論)」ㆍ「양생주(養生主)」ㆍ「인간세(人間世)」ㆍ「덕충부(德充符)」ㆍ「대종사(大宗師)」ㆍ「응제왕(應帝王)」으로 되어 있으며, 「외편」은 「병무(騈拇)」 이하 15편, 「잡편」은 「경상초(庚桑楚)」 이하 11편 등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장자가 쓴 것은 「내편」 7편뿐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세의 장자학파 사람들이 장자에 가탁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장자가 살았던 연대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장자는 몽현(蒙縣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邱縣))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고, 옛날에 몽현의 옻나무 밭을 지키는 관리였다. 그리고 위(魏)나라 혜왕(惠王),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다.”고 한다. 위나라 혜왕의 재위 시기는 기원전 370년~기원전 319년이고, 제나라 선왕의 재위 시기는 기원전 319년~기원전 301년이었으므로, 장자는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장자의 경력에 대해서는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 아내가 있었고[지락편(至樂篇)], 제자가 있었다는 것[산목편(山木篇), 열어구편(列禦寇篇)]을 알려 주는 이야기나, 그의 가난에 대해 말하면서 감하후(監河侯)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는 이야기[외물편(外物篇)], 넝마를 입고 위나라 혜왕을 만난 이야기[산목편(山木篇)] 등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사기』에는 장자를 재상으로 삼으려는 초(楚)나라 위왕(威王)의 요청에 대해 진흙탕에 뒹굴어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로 보기 좋게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장자는 만물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도(道)’라 하고, 그 ‘도’에서 보자면 모든 사실에는 구별이 없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 즉 만물은 모두 동일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도’와 일체화하는 것, 곧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자유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이를 위한 수양을 ‘심재(心齋)’, ‘좌망(坐忘)’이라고 했다. 또한 자연을 훼손하는 인위적 행위를 배척하고, 인위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실제로는 유용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은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철학과 종교사상, 특히 불교의 선종(禪宗)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요성은 도(道)를 그 이전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천명한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한 조화보다 더 복잡하고 계몽된 형이상학적 ‘숙명주의’로 해석한 데 있다. 즉 “인간은 만물유전의 법칙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스스로를 속박하는 개인의 목표나 전통 및 주위 환경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것을 감싸는 신비스러운 도와의 조화 속에서 거리낌 없이 살게 된다.”고 하여, 사생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함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이 위대한 실존을 좋게 또는 나쁘게도 바꿀 수 없으므로, 도를 깨친 사람은 불확실성·불리함·악(惡)·죽음 등이나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번거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구하거나 도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장자』는 끊임없는 변화를 주된 주제로 하면서, 비록 이 변화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생활을 존재의 흐름에 맞춤으로써 평안을 얻는다고 보았다.

『장자』 속의 이야기는 대개 우언(寓言)의 형태를 띠고 있어,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대개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뛰어난 우언으로 ‘장주호접(莊周胡蝶)’ㆍ‘혼돈개규(混沌開竅)’ㆍ‘포정해우(庖丁解牛)’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곽소현, 「장자 수양론에서의 은유-유가 정명론과의 충돌에서 장자 수양 은유의 가치 창조로」, 『철학논총』79, 새한철학회, 2015.
  • 박범수, 「장자에 있어서의 도의 예술정신」, 『미학』28, 한국미학회, 2000.
  • 이홍자, 「『장자』 양생주에 나타난 수사기교의 고찰」, 『동아문화』1,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81.
  • 허수선, 「장자 사상을 통한 한국교육의 대안 모색-外馳에 대한 대응방안을 중심으로」, 『철학논총』74, 새한철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