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작(張世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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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병된 명의 장수.

개설

장세작이 임진왜란 당시 명에서 맡았던 정식 관직은 부총병(副摠兵)이었다. 하지만 우협대장으로 임명되어 여러 명의 부총병과 참장(參將), 유격(遊擊) 등을 통솔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서 평양 회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장수였다. 하지만 이후 이여송 등이 명군을 인솔하고 진격하려던 계획을 적극적으로 저지했다. 이여송은 자신의 측근이었던 장세작 등의 의견에 따라 회군하여 주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되었던 명군은 조승훈(祖承訓) 등이 인솔하는 요동군(遼東軍)이었다. 1592년(선조 25) 7월 당시 명군은 3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매복 작전 때문에 크게 패했다. 이후 명에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10만 대군을 파병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 11월까지도 명군은 조선으로 출동하지 않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명은 조선에 대한 대규모 출병을 준비하였으며 마침내 대군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명에서는 병부 시랑(侍郞) 송응창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이여송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은 4만 3천 명 규모의 명군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동했다. 이때 장세작은 우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총병조승훈, 오유충(吳惟忠), 왕필적(王必迪), 참장조지목(趙之牧), 장응충(張應忠), 낙상지(駱尙志), 진방철(陳邦哲), 곡수(谷燧), 양심(粱心) 등의 장수를 통솔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12월 1일).

명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당시 장세작은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의 북문인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을 부수고 진격했다. 이때 이여백(李如栢)은 남문인 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은 서문인 보통문(普通門)을 부수고 공격해 들어갔다. 결국 일본군 1,2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일본군의 수도 매우 많았다. 그리고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남녀 1,200여 명을 구출했다. 또한 일본군의 야간 습격을 격퇴하고 추격해 또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

평양성 탈환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의 진격을 요청했다. 이여송은 군사를 인솔하고 파주(坡州)까지 진격해서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여송은 자신이 군사를 인솔하고 벽제(碧蹄)까지 갔는데, 이는 직접 한양을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여송이 동파(東坡)로 물러나 명군을 주둔하려 하므로 유성룡(柳成龍)을 위시한 조선의 대신들이 군사를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했다. 하지만 장세작은 누구보다 강하게 철군해서 주둔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얼굴과 말투에 노기까지 띠면서 조선의 대신들을 물러가도록 했다(『선조실록』 26년 2월 10일). 장세작의 이러한 행동은 조선 조정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1593년에 이여송과 함께 명으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최소자,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동양사학연구』11, 동양사학회, 1977.
  •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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