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長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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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강호(江戶) 시대의 무장·대명(大名).

개설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신종하여 문무 양면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수길을 돕는 다섯 명의 유력 정치·행정가인 이른바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였으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이끄는 동군에 패함으로써 전후에 몰락하였다. 1615년 덕천씨(德川氏)에 반기를 든 아들 성차(盛次)의 행동에 연좌되어 자해하였다.

가계

증전씨(增田氏)는 미장국(尾張國)의 증전촌을 근거지로 삼은 일족으로 보이지만, 장성 이전에 이렇다 할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료에서 장성의 부모도 확인되지 않는다. 장성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성차(盛次)는 1615년에 전사하였으며, 장승(長勝)과 신병위(新兵衛)가 대를 이어갔다. 참고로, ‘증전’의 일본어 발음은 ‘마스다’가 아닌 ‘마시타’이다. 당대의 사료에 ‘마시타’라고 읽는다는 메모가 확인되며, ‘增田’의 음차로 ‘眞下’라는 표기도 보인다.

활동 사항

애초에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수하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1570년대부터는 수길에게 신종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1584년 소목(小牧)·장구수(長久手)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2만 석 대명으로 거듭났으며, 이듬해 우위문위(右衛門尉)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전투에 참가하는 모습이 확인되지만, 주로 병참 업무와 전후 처리를 담당하는 등 일종의 행정 관료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수길이 펼친 전국 단위의 토지조사사업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도 본래 병참 업무를 맡았으며, 수길의 지시에 따라 명의 사절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죽음을 앞둔 수길이 장성 등에게 아들 수뢰(秀賴)의 보좌를 부탁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수길 사후에는 덕천수충(德川秀忠)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1600년 관원 전투에서도 서군에 몸담았다. 전후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고야산(高野山)으로 추방당했다. 1615년 71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묘소

기옥현(埼玉縣) 신좌시(新座市) 평림사(平林寺)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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