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각(藏書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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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 이전까지 있었던 이왕가(李王家)와 이왕직(李王職)에서 생산 및 수집, 구매한 전적들을 소장하던 왕실도서관.

개설

고대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왕실에 장서각(藏書閣)을 두어 전적을 수집하고 학문을 발흥시키는 것을 제왕의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송나라 진종(眞宗)의 장서각인 천장각(天章閣)은 조선시대에 늘 회자되던 왕실의 도서관이었다. 조선왕조에서도 개국 초부터 왕실의 도서관을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의 사화와 당쟁, 외침으로 장서각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한 채 그 명맥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고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왕실도서관을 두려고 전적 수집과 구매에 나섰으나 일제의 강점으로 중단되었다. 다만 1911년부터 이왕직이 이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수립되면서 왕가도서관인 장서각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때의 장서각은 이왕직이 관리하였으나 이왕실의 장서 수집이 주요 운영 목적이었으므로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던 왕실도서관 설립의 기본 방침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장서각이라고 부르는 왕실도서관을 조선전기부터 설치했다. 세종대는 집현전에 장서각을 세웠다(『세종실록』 10년 8월 7일). 집현전 박사들은 매일 집현전장서각의 책들을 자유롭게 열람하면서 학업에 임할 수 있었다(『세조실록』 8년 1월 17일). 그러나 세조대에 집현전을 없애면서 그 기능이 사라지고 장서각이라는 이름은 홍문관장서각, 승문원장서각, 성균관장서각 등 다양한 서고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성종실록』 6년 2월 29일). 이때부터 고종대까지 궁궐의 장서각이란 홍문관장서각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개국 이래 개항과 서구 문명의 유입이라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직접 체험한 왕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문물의 학습과 수집에 관심이 깊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서적의 수집에 노력하면서 왕실도서관을 두려고 하였다. 물론 고종이 왕실에 도서관을 설립하려고 한 것은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전례를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장서각은 1908년(순종 1)에 고종이 덕수궁에 각종 서적들을 수집하여 황실도서관을 세우고자 했던 것에서 시작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제국의 위상에 맞는 제실도서관(帝室圖書館)을 개관하여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그 기능을 잃고 사라졌다. 다만 고종이 세우려던 황실도서관의 계획은 1911년에 이왕직이 성립되면서 만들어진 장서각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전적들을 수집하면서 계승되었다.

이왕직은 일본이 1910년에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황실 구성원과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이왕직은 일본궁내성과 조선총독부의 지휘 감독을 받으며, 고종과 순종 등의 왕족부터 궁(宮)·묘(廟)·능(陵)·원(園)·묘(墓)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과 재산을 관리하였다.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은 이태왕(李太王), 순종은 이왕(李王)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궁내성에서 관리하는 왕족이 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정치적 기능과 국가로서의 통치권을 빼앗으면서 조선왕실이라는 지위만 유지하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 상징인 종묘와 궁·능·원·묘는 유지되었으며, 기존의 의례적 행사도 계속 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조선왕실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설립된 이왕직에서 도서를 수집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장서각이다.

장서각은 이왕직이 탄생한 뒤에 만들어진 왕실도서관이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인 이왕직을 1910년 12월 30일에 이왕직 관제 14조를 공포하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왕직 직원은 1911년 2월 1일 자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이왕직 조직은 서무계, 회계계, 장시계(掌侍係), 장사계(掌祀係), 장원계(掌苑係)의 5개 계로 업무를 분장하였는데, 장서각의 기능은 서무계 소속이었다. 서무계는 증답(贈答)과 보첩(譜牒), 사장(詞章), 고인(古印), 부책류(簿冊類)의 보관, 관인(官印) 및 직인(職印)의 보관, 궁궐 규칙 및 기타 중요한 공문서의 기초 및 심사, 공문 서류의 접수, 발송, 편찬, 보관 및 통계 보고, 도서의 보관, 출납 및 열람, 직원의 진퇴와 신분 등을 관장하였다.

1911년 2월에 서무계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서적 3,528책, 대한제국궁내부 전모과(典謨科)가 관장했던 12,615책과 공문서 등을 넘겨받았다. 특히 6월에는 새로 구입한 서적 3,528책과 구 궁내부에서 인수한 공문서 및 서적 12,615책,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와 선원각(璿源閣)에서 이송해 온 서적 4,066책을 이관받아 왕실의 전래의 전적들을 갖추게 되었다(『순종실록부록』 4년 6월 19일). 장서각에서는 인수한 자료들을 전모 자료와 일반 자료로 구분해 정리하였다. 전모 자료는 창덕궁의 대유재(大酉齋) 자리에 지은 봉모당과 보각에 보관하였으며, 일반 자료는 옛 선원전 건물에 보관하면서 이왕직서무계도서실(李王職庶務係圖書室)을 두었다. 이후 이왕직서무계도서실에 수집 전적과 구입 도서가 증가하자 1915년 12월에 창경궁 낙선재 동남쪽에 현대식 4층 벽돌집을 세우고 도서들을 이전하였으며, 1918년에 이 건물 정면에 장서각이라는 현판을 건 이후부터 장서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장서각에 소장된 책들을 장서각 도서라고 불렀다. 1938년에 창경궁 자경전 터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기존 건물에 장서각 도서들을 이전하였고, 영춘헌과 집복헌을 부속 건물로 사용하였다.

변천

1945년 11월 8일에 미군정은 이왕직을 해체하고 구왕궁사무청으로 개편하면서 장서각 도서는 그대로 관리하게 했다. 1955년 6월 8일에 구왕궁사무청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칭하였고, 장서각 도서는 창경원 사무소에 이관하였다. 1961년 문교부 산하에 문화재관리국이 신설되었으며, 이후 장서각 도서를 관리하였다. 이때 각 궁궐에 소장된 전적 중에서 칠궁(七宮)의 자료들을 장서각으로 이관하였다. 1968년 문화재관리국은 문화공보부 소속이 되었으며, 1911년 이후부터 봉모당과 보각에 보관되던 전적도 장서각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에는 창경궁에 장서각사무소가 신설되어 장서각 도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종묘와 수릉·명릉·온릉·건릉 등에 소재한 자료들을 추가로 이전하였다. 1981년에 대통령령 제10588호에 따라 장서각사무소를 폐지하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문화재 연구에 필요한 것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로, 그 밖의 장서각 자료들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어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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