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각(藏譜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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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잠저인 창의궁 내에 영조의 장적과 어진을 봉안하던 곳.

개설

장보각(藏寶閣)은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 내에 있던 건물로 영조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였다. 1866년(고종 3)에 장보각에 화재가 일어나 이곳에 모시던 어진을 육상궁(毓祥宮) 내에 어진을 모시던 냉천정(冷泉亭)으로 옮겼다. 이후 다시 장보각을 수리하여 어진을 봉안하였지만,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으로 내수사(內需司)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며 창의궁이 폐해지면서 장보각도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창의궁은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살던 잠저이다. 그 위치는 경복궁(景福宮)의 서쪽, 현재 서울특별시종로구 통의동 일대이다. 장보각은 창의궁 내에 있던 건물로 영조의 어진 및 왕실에서 바쳐진 물품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창의궁은 숙종과 숙빈최씨(淑嬪崔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연잉군(延礽君)의 궁가(宮家)이다. 1711년(숙종 37)에 이현궁(梨峴宮)에 있던 숙빈방(淑嬪房)이 옮겨지면서 숙빈최씨의 궁가 역할도 겸하였다(『숙종실록』 37년 6월 22일). 1718년(숙종 44)에 숙빈이 사망하여 숙빈묘(淑嬪廟)가 만들어지자 숙빈방의 기능은 숙빈묘로 이관되었으며,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어 궐내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창의궁은 동궁(東宮) 소속의 궁가가 되었다.

이후 창의궁은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1729년(영조 5)에는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자, 그를 제향하기 위한 효장묘(孝章廟)를 창의궁 서쪽에 건립하였다(『영조실록』 5년 1월 13일). 1752년(영조 28)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 사이에서 태어난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죽자, 그 신위를 모시기 위해 창의궁 내에 의소묘(懿昭廟)도 세웠다(『영조실록』 28년 3월 10일).

창의궁 내 건물에 ‘장보각’이라는 영조의 어필(御筆)이 내려진 것은 1765년(영조 41)의 11월 18일의 일이다. 영조는 효장묘의 일부에 해당하는 건물에 효장세자와 효순빈(孝純嬪)의 연보(年譜) 및 의소세손의 연보를 감실(龕室)에 보관하고 장보각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1776년(정조 즉위)에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효장묘에 봉안하던 신위와 장보각에서 보관하던 연보 및 유물을 모두 창덕궁 안 연복전(延福殿)으로 옮겨 가고 장보각에는 의소세손의 연보만 남았다.

창의궁 내에 영조의 어진이 모셔진 것은 1780년(정조 4)으로 정조가 창의궁 내에서 영조의 어진을 봉안할 곳으로 영조의 장적(帳籍)을 보관하던 양성헌(養性軒)을 지목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영조의 장적은 강화부(江華府)의 적고(籍庫)에 옮겨 봉안하였기 때문에 양성헌은 빈 상태였다. 1781년(정조 5)에 정조는 강화부에서 영조의 호적을 가지고 오게 하여 열람한 뒤 장보각에 봉안토록 하였다(『정조실록』 5년 12월 20일).

이후 양성헌이 누수로 인해 퇴락해서 수리가 반복되면서 1789년(정조 13)에 영조의 어진은 장보각으로 옮겼으며, 창의궁이 폐지될 때까지 장보각은 영조 어진 봉안소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내각일력(內閣日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