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주(長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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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구현(山口縣) 동북부에서 서반부(西半部)를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의 하나로 고대~중세 행정구획인 5기7도(五畿七道) 가운데 산양도(山陽道)에 위치하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고대 시기에는 북부 구주(九州)와 마찬가지로 외교·방위를 위하여 중시되었다.

형성 및 변천

겸창(鎌倉)시대에는 몽골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1276년에 장문탐제(長門探題)를 설치하였다. 실정(室町)시대와 전국(戰國)시대에는 주방국(周防國)의 산구(山口)를 본거지로 하는 대내씨(大內氏)가 관할하였으나 이후 안예국(安藝國)의 모리씨(毛利氏)의 손에 넘어갔다.

조선시대에도 전기부터 후기까지 장문주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등장하는데, 1466년(세조 12)부터 1493년(성종 24)까지 조선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12년 5월 7일)(『성종실록』 24년 8월 21일). 그러나 1483년(성종 14)에 장문주 적간관 태수(赤間關太守)가 보낸 사자(使者)에 대하여 그대로 돌려보내게 한 기록이 있는데 상호 교류한다는 통신 수호(通信修好)의 약속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성종실록』 14년 11월 14일). 1590년(선조 24) 정사(正使)황윤길(黃允吉)을 비롯한 통신사 일행이 대판(大阪)에 있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나러갈 때 장문 등을 거쳐 갔다는 기록도 있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1719년(숙종 45)에는 전라도 낙안의 백성 19명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장문주 경계에 정박하였는데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 호송해서 돌아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장문주에서는 표류민들에게 옷과 양식을 주고 사망한 사람을 염습(殮襲)하여 입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숙종실록』 45년 5월 29일)

1871년 명치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산구(山口)·풍포(豊浦)·청말(淸末) 등 3개의 현이 성립하였지만 같은 해 말에 주방국(周防國)과 장문국이 통합되었다.

명칭 유래

원래는 혈문(穴門)·혈호(穴戶)라고 썼다. 665년에 장문국(長門國)이 처음 쓰였다. 혈문·혈호의 혈은 움푹 들어갔다는 뜻이고, 문과 호는 좁은 해협이라는 뜻이다.

자연 환경

서중국(西中國) 산지와 그 지맥 가운데 기복(起伏) 산지가 많고 그 사이를 아무천(阿武川)·목옥천(木屋川)·후동천(厚東川)·후협천(厚狭川)·심천천(深川川) 등이 흐르고 있다.

위치 비정

본주(本州)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하며 동쪽은 석견국(石見國: 현 도근현(島根縣) 서쪽 지역)과 주방국(周防國: 현 산구현(山口縣) 동쪽 지역)과 접하고 있고 다른 3면은 뇌호내해(瀨戶內海)·향탄(響灘)·우리나라의 동해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해역을 끼고 기내(畿內)·남해도(南海道)·서해도(西海道)·조선·중국을 향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