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지(莊陵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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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의 사실과 숙종 때 복위될 때의 여러 문제를 기록한 책.

개설

『장릉지(莊陵誌)』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의 사실과 숙종 때 복위될 때의 여러 문제를 기록한 책이다.

1711년(숙종 37) 당시 영월부사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 2권을 구지(舊誌)라 하였고, 그뒤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 박경여가 권화와 함께 속지(續誌) 2권을 증보해서 『장릉지』라고 개제하였다. 구지는 1441년(세종 23)부터 1653년(효종 4)까지의 사실을, 속지는 1662년(현종 3)부터 1740년(영조 16)까지의 사실을 수록하였다. 또한 구지는 사실ㆍ분묘ㆍ사묘ㆍ제축ㆍ제기ㆍ부록 등을, 속지는 복위ㆍ봉릉ㆍ제기ㆍ육신복관(六臣復官)ㆍ건사제문(建祠祭文) 등을 수록하고 있다.

서지 사항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2.1cm, 가로 21.2cm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조선 초기에 세종, 문종을 지나, 다시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에 성삼문, 박팽년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1457년(세조 3) 9월에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 일을 빌미로 단종도 죽음을 당했다.

숙종 대에 들어와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고, 육신의 관작이 복권되었다. 숙종은 ‘군신의리’의 표상인 이들의 제자리 찾기를 주도하면서,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로 국정 운영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조는 숙종을 이어서, 단종 관련 사적을 정비하고, 육신만이 아니라, 계유정난 피화인인 삼상(三相;황보인ㆍ김종서ㆍ정분), 심지어 궁인들까지 현창 대상을 확대시켰다. 또 육신과 삼상에게 ‘충(忠)’자 시호를 내려, 이들의 충절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화했다. 정조는 숙종과 영조를 이어서, 위 사업을 계승함은 물론 두 국왕보다 한층 더 확대 발전시켰다. 단종의 능인 장릉에 배식단(配食壇)을 건립하여, 단종 관련 피화인을 최대한 배식하여, 기존 사업을 집대성했다. 이는 후일 사도세자의 국왕 추숭을 대비한 사도세자 보호세력의 현창을 위한 전범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이로써 단종 관련 현창 사업이 일단락되었다

단종은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그리고 1711년(숙종 37)에 단종의 사적을 새로 모아, 『장릉지』를 간행했다. 『장릉지』를 펴낸 것은 범례에서 말한 대로 당시에 쓰인 자료들은 사실이 왜곡되어 있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릉지』에 인용된 『음애일기』에 따르면, “노산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말장난이다. 당시 실록을 편찬한 자들은 모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라고 하여, 실록에 전하고 있는 단종의 일은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장릉지』에는 단종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단종)에게 1457년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던 왕방연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 (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 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가 전한다. 그는 밤에 굽이치는 여울의 언덕 위에 앉아 슬퍼하면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뒤 1617년에 김지남(金止男 )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이 『장릉지』에 부록된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 중의 「육신전(六臣傳)」은 남효온 자신이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서, 사육신의 살신성인한 숭고한 절의를 영구히 후세에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쓴 기록이므로, 그 필법은 세조에 아부하던 당시 사관들의 곡필기록(曲筆記錄)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 한 가지 예를 들면, 『세조실록』 제9권 3년 10월 신해조에는 “임금이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사사(賜死)하자, 노산군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릉지』에는 “세조 3년(丁丑年)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淸泠浦)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 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세조실록』의 기사는 세조에 아부하던 사관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참고문헌

  • 박상현, 「번역으로 발견된 ‘조선(인)’」, 『일본문화학보』 제46권, 한국일본문화학회, 2010.
  • 윤정, 「정조대 단종 사적 정비와 ‘군신분의’의 확립」, 『한국문화』 제35집,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2005.
  • 이해준,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 논란과 재평가의 성격」, 『유학연구』 제28집,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 이현진, 「조선후기 단종 복위와 충신 현창」, 『사학연구』 제98호, 한국사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