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루(掌漏)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서운관(書雲觀)에서 누각과 시보를 담당하던 종7품의 관직.

개설

고려말기인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서운관을 새로 열고 직제를 개편하면서 기존의 설호정(挈壺正) 직책을 장루(掌漏)로 고치고 종7품 관직으로 설치하였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서운관의 직제를 그대로 이어서 서운관에 종7품의 장루 4명을 설치하였다. 1420년(세종 2)에는 2명으로 감원하였고, 1466년(세조 12)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할 때 장루를 직장(直長)으로 개칭하였다.

담당 직무

서운관에서 ‘물시계의 관리[漏刻]’와 ‘시간을 알리는 일[時報]’을 담당하는 직무를 맡았다.

변천

장루란 직명은 고려말인 1308년에 사천감과 태사국을 합쳐 만든 서운관의 직제 조정에서 종7품의 관직으로 설치하였으며, 서운관의 실관(實官) 중에서 가장 높다. 장루 아래로 정8품의 시일(視日), 종8품의 사력(司曆), 정9품의 감후(監候), 종9품의 사신(司辰)을 두었다.

조선 태조의 문무백관 직제 제정에서도 고려말기의 서운관 직제를 그대로 이어와 장루를 종7품으로 삼았으며, 인원을 2명에서 4명으로 증원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20년에 서운관 정원이 중국의 흠천감(欽天監)에 비해 너무 많다는 의견에 따라 장루 4명을 2명으로 줄였다(『세종실록』 2년 3월 13일). 1466년 1월 관상감으로 개칭할 때 장루도 직장으로 바뀌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당나라 사천대(司天臺) 직제에 정8품 상(上)의 관직으로 설호정을 설치하여, 누각의 일을 관장하고, 중성(中星)과 혼명(昏明)을 관찰하여 종고(鐘鼓)를 쳐 시보하도록 하였는데, 고려초기 태사국의 설호정은 이를 말한다. 송나라의 사천감(司天監) 또는 태사국(太史局), 요나라의 사천감, 명과 청나라의 흠천감에도 종8품의 설호정 직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고려초기 태사국에 시간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설치한 설호정은 당나라 사천대의 직제를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말기 충렬왕 때 서운관으로 개편하면서 설호정 대신에 장루를 설치하면서 직품을 올려 종7품으로 삼았고, 이를 조선의 서운관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1415년(태종 15)에 이조(吏曹)에서 서운관에 장루와 사신 직책이 있는데 또 별도로 금루방(禁漏房)을 두었으니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하여, 금루방을 폐지하고 그 관원들을 서운관에 합하도록 조직을 개정하였다(『태종실록』 15년 12월 19일).

1423년(세종 5) 6월에 병조에서 화재에 대한 금화(禁火) 정책을 건의하면서, 만일 궐내에 화재가 발생하면 장루를 맡은 자가 불을 끌 때까지 종을 칠 것을 제안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27일).

1439년(세종 21)에는 평안도관찰사가 평양 토관직(土官職)의 명칭과 등급을 개정하기를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장루서(掌漏署)의 설호정은 중국의 관제이므로 승(丞)으로 개칭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1년 3월 28일). 1462년(세조 8)에 팔도의 토관직을 일제히 정비하면서 평양부의 토관 91명을 60명 정원으로 축소하였다. 이때 시간을 아뢰는 일을 담당하는 장루서에 종8품 직장 1명, 종9품 녹사(綠事) 1명을 둔다 하였다. 함흥부(咸興府)는 어향(御鄕)이라 하여 평양부에 준하여 장루서를 두었고, 역시 종8품 직장 1명, 종9품 녹사 1명을 배속하였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