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파보(將軍坡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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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명천부에 설치한 군사시설인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장군파보가 설치된 명천부(明川府)는 1398년(태조 7)에 명원역(明原驛)이라는 이름으로 길주목(吉州牧)에 소속되었다. 1461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길주목이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면서 영평령 이북을 경계로 땅을 분리하여 명천현(明川縣)을 신설하였다. 1517년(중종 12)에 명천읍성이 축조되고 1605년(선조 38)에 명천부로 승격되었다. 장군파보는 명천부에서 삼수(三水)·갑산(甲山)이나 백두산 방향으로 가는 도로변에 설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명천부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66리(약 26㎞)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장군파보는 장군파령(將軍坡嶺)과 장군파천(將軍坡川)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군파보를 설치한 곳은 지형이 지극히 높아서 추위가 훨씬 심했기 때문에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도 곤궁하였다(『중종실록』 17년 6월 24일).

장군파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북쪽의 삼수·갑산이나 경성부 방향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통해 적군이 침입하였을 경우 서울로 빠르게 내려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명천과 길주로 이어진 도로였다. 명천군에 소속된 장군파보와 사마동보가 해당 도로들의 방어를 책임졌다.

변천 및 현황

1521년(중종 16) 처음 설치되었다. 함경도 이원군(利原郡)에 있던 이덕보(梨德堡)를 폐지하고 장군파로 옮겨 설치한 것이 바로 장군파보이다. 장군파보는 교통의 요충지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형이 험준하고 추위가 심하여 백성들이 정착하기가 힘들었다. 이로 인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 논의가 제기되었고, 함경감사허굉(許硡)의 제안에 따라 1522년(중종 17)에서 1524년(중종 19) 사이에 폐지되었다(『중종실록』 19년 7월 17일).

형태

석성의 형태로 수축되었고, 둘레가 1,464척(약 444m), 높이가 8척(약 2.4m)이었다. 성안에는 우물이 두 개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22년(중종 17) 함경도절도사우맹선(禹猛善)은 함경도가 적들이 침입해 오는 통로라서 일찍이 장군파와 황사언동(黃士彦洞) 등에 보를 쌓기는 했지만, 병력이 적고 무기가 갖추어지지 못했으니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장군파가 지형이 높고 추위가 심해 농사가 잘되지 않아 보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계도 해결해야 했다. 비변사에서는 인근의 서북보(西北堡)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오곡을 심어 먹는데 장군보만 유독 농사지어 먹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백성들의 식량이 중요하니 우선 먼 마을 주민들은 장군보에 들어가지 말도록 하고 농사가 잘되길 기다렸다가 다시 투입시킬 것을 제안하였다(『중종실록』 17년 6월 24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