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격이(張格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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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투르키스탄의 아파키 호자(Āfāqī khoja) 일족으로 청국으로부터 카슈가리아(Kashgaria) 지역을 빼앗고 장격이의 난을 일으킨 인물.

개설

장격이는 청국 관리가 남부 변경 지역을 가혹하게 다스리는 점을 이용해서 세력을 확장시켰다. 1826년 여름부터 장격이는 호한(浩罕) 수령 아리한(阿里汗)과 함께 남부 변경에 위치한 4개 성인 커선가얼[喀什噶爾], 영지사얼[英吉沙爾], 선얼챵[葉爾羌], 호텐[和闐]을 함락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200,000여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한편 장격이가 커선가얼을 점령하자, 영국은 20여 명을 고문관 자격으로 장격이 일당에게 파견하여서 군사 훈련을 돕는 한편 청 국경을 둘러싼 현지 정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청국의 도광 황제는 장격이를 생포하는 경우 왕으로 책봉하고 은 100,000냥을 상으로 준다는 포고를 내릴 정도로 장격이의 난 진압에 주력하였다. 이리장군(伊犁將軍) 장령(長齡), 섬감총독(陝甘總督) 양우춘(楊遇春), 산동순무(山東巡撫) 무륭아(武隆阿) 등에게 장격이의 난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1827년에 장령이 대군을 이끌고 아얼바터, 사부더우얼 등에서 장격이의 난군을 무찌르자, 장격이 세력은 후퇴를 거듭하였으며, 커선가얼의 입구인 아커와바터에서 최후의 일전을 맞이하였다. 그곳에서 장격이 세력은 속전속결로 진격하는 청군의 기병에 패배하여 60,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장격이는 도주에 성공하였지만, 8개월 뒤인 1828년에 붙잡혀서,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처벌되었다.

가계

신강(新講)의 백산(白山)파 태화탁(大和卓)의 부르한 앗 딘([波羅尼都], البرهان الدين)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부르한 앗 딘이 주살된 이후 호한으로 도망가서 낳은 아들이 장격이였다.

활동 사항

1828년에 동지 정사 송면재(宋冕載)와 부사 이우재(李愚在)는 청 관병이 장격이의 난의 우두머리인 장격이를 생포하였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순조실록』 28년 2월 26일). 한편 청도광 황제는 조선에 칙서를 보내서 장격이를 사로잡았다는 소식과 더불어 장격이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순조실록』 28년 3월 24일). 그리고 조선 정부는 도광 황제의 조서를 통해서 장격이의 난 전모를 확인하였는데(『순조실록』 29년 4월 4일), 장격이는 역적의 괴수이자 죄를 짓고 도망친 자의 후손으로 묘사되었다.

참고문헌

  •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중국을 말한다』 14, 신원문화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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