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과(雜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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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문 기술관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

개설

조선시대의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의 시험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잡과는 1399년(정종 1)부터 1894년(고종 31)에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시행되었다. 잡과는 역관·의관·음양관·율관들에게 최고의 입사로(入仕路)였다. 기술관이 참상관(叅上官) 이상의 고급 기술 관료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잡과 합격이 필수적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잡과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 네 종류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의(醫)·복(卜)·지리(地理)·율(律)·서(書)·산(算)·삼례(三禮)·삼전(三傳)·하론(何論) 등의 잡업(雜業)이 있었으며, 잡업 시험에는 삼례·삼전·하론 등 유교 과목이 포함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서학(書學)·산학(算學)이 취재(取才) 시험으로 바뀌고, 경전(經傳)시험인 삼례·삼전·하론이 빠졌다.

잡과는 1392년(태조 1)에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따라 문음(門蔭)·문과·무과 이외에 잡과로서 이과(吏科)·역과·의과·음양과가 포함되었다(『태조실록』 1년 8월 2일). 1393년(태조 2)에 의학과 율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통달한 사람을 시험하여 충원하도록 하였으며(『태조실록』 2년 7월 14일), 병학(兵學)·율학(律學)·자학(字學)·역학(譯學)·의학(醫學)·산학의 6학을 설치하였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그리고 1397년(태조 6)에 고시관조준과 정도전이 잡과 명의(明醫) 8명과 명률(明律) 7명을 뽑았다(『태조실록』 6년 2월 22일). 이는 의과와 율과 실시를 말해 주는 것으로 1399년(정종 1)에 역과·의과·음양과·율과 체제로 정비되었다(『태종실록』 1년 6월 4일). 그로부터 1894년(고종 31)에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시행되었다. 식년시(式年試) 164회, 증광시(增廣試) 69회 등 총 233회 실시하였다.

잡과는 역관·의관·음양관·율관 등 기술관이 종6품 참상관 이상의 고급 기술 관료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잡과 합격이 필수였다. 잡과는 문과·무과와 달리 전시(殿試)가 없이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만 보였으며, 향시(鄕試)는 역과의 한어과(漢語科)에만 실시하였다. 시험 종류도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증광시와 대증광시(大增廣試)가 있을 뿐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초시에서 111명을 선발하였다. 잡과별로 보면, 역과 57명, 의과 18명, 음양과 18명, 율과 18명이었다. 복시에서는 그들 중에서 다시 46명을 선발하였다. 역과 19명, 의과 9명, 음양과 9명, 율과 9명이었다. 각 과별로 살펴보면 역과의 한학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초시에서 복시 인원의 2배수를 선발하였다. 한학(漢學)은 역과 내에서 비중이 월등히 커서 초시 선발 인원 57명 중 45명으로 다른 역학인 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에 비하여 비중이 높았다. 중국에 대한 외교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한학은 역과 내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초시와 복시를 거치는 선발 방식이나 선발 인원은 식년시나 증광시가 동일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국가의 경사가 겹치는 대증광시에서는 더 많은 인원을 뽑았다. 각 과 전공별로 초시에 4명, 복시에 2명씩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역과 27명, 의과 11명, 음양과 15명, 율과 11명 등 모두 64명을 뽑았다.

시험 과목은 역과·의과·음양과·율과의 각 전문서(專門書)와 『경국대전』을 필수 과목으로 하였으며, 초시와 복시가 동일하였다. 각 과목은 통(通)·약(略)·조(粗)로 채점하는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점수가 많은 사람을 선발하였다. 『속대전』 이후 잡과 시험 과목이 모두 축소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이때에도 식년시와 증광시의 시험 과목은 동일하였다.

합격자에게는 처음에는 홍패(紅牌)를 주었으나 나중에 백패(白牌)로 바꾸었다(『세종실록』 1년 4월 20일). 백패는 백색 용지에 구관(具官), 성명, 역과·의과·음양과·율과의 구분, 성적 순위를 기록하였다. 문무과의 홍패나 생원진사의 백패와 달리 교지(敎旨)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교첩식(敎牒式)을 따랐다. 따라서 서식의 말미에 해당 관청의 판서(判書)·참판(叅判)·참의(叅議)·정랑(正郞)·좌랑(佐郞)의 수결(手決)과 관인(官印)을 찍었다.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에게 주는 백패에는 국보(國寶)를 찍었으나, 잡과의 백패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 주었다. 합격자에게는 등수에 따라 품계를 수여하였다. 역과 1등은 종7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을 받았으며,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이미 품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1계를 더 올려 주고, 올린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다시 1계를 더 올려 주었다. 잡과 합격자들은 각 아문의 권지(權知)로 임명하였다.

잡과 합격자 명부인 『잡과방목』을 분석해 보면, 법규대로 46명을 선발한 경우는 드물었으며, 19세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정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잡학의 특성상 정원에 구애받지 않고 통역·의술·천문·법률에 능통하고 기능이 우수한 자들을 뽑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평균 선발 인원이 57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는데, 당시 법정 인원 48명보다 약 10명씩 더 뽑았다. 잡과 운영에서 19세기 전반까지는 법정 인원이 지켜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문무과의 남설(濫設)과 비교할 때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 18세기 말부터는 잡과에서도 왕실의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직부(直赴)가 이루어졌다. 직부가 처음으로 『잡과방목』에 나타나는 것은 1790년(정조 14) 시험이었다. 또한 추부(追付)가 실시되었는데, 점수는 같으나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나중에 다시 합격시켜 준 것으로, 19세기 잡과 입격자의 급증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

변천

『경국대전』의 잡과 선발 인원은 『속대전』·『대전통편』 때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대전회통』에 와서 음양과의 명과학 선발 인원이 늘어났다. 1797년(정조 21)에 관상감 제조이시수(李時秀)의 청에 따라 명과학의 정원을 늘리도록 하였으며(『정조실록』 21년 11월 12일), 이를 『대전회통』에 법규로 반영하였다. 음양과 초시 정원이 4명에서 8명, 복시가 2명에서 4명으로 늘어남으로써 음양과의 정원은 11명이 되었으며, 잡과 선발 정원도 46명에서 48명으로 늘어났다. 대증광시 역시 17명으로 정원이 증가하여, 잡과 선발 정원이 64명에서 66명으로 늘어났다. 잡과 내 위상은 1777년(정조 1)까지 역과가 으뜸이었으나 『대전통편』에서 음양과로 첫째 자리가 바뀌었다. 음양과의 선발 인원이 늘어난 것은 사기 진작의 차원과 함께 조선후기에 시헌력(時憲曆)의 이해가 심화되고 시헌력을 기반으로 한 명과학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천문(天文)·지리(地理)·역수(曆數) 등의 일을 담당하는 음양관 역할이 증대된 것과 관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잡과방목(雜科榜目)』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중인 연구』, 이회문화사, 1999.
  • 이성무, 『한국과거제도사』, 민음사, 1997.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이남희, 「잡과의 전개와 중인층의 동향」, 『한국사시민강좌』 46, 2012.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1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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