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채(潛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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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허가를 얻지 않고 광물을 채굴하거나 인삼을 채취하는 행위.

개설

잠채는 몰래 무엇을 캐낸다는 뜻의 단어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중앙 혹은 지방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행해진 광물 채굴 행위와 광산 운영방식 혹은 인삼의 불법 채취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초기 광업은 농민의 부역노동에 의하여 국가가 운영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군영문의 감관제하의 군수광업(軍需鑛業)이 지배적인 형태였다. 군영문에서는 조총 등 각종 무기와 화약 및 탄환을 제조하기 위하여 철·유황광·연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군영문의 군수 광산 운영은 정부의 재력과 인력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결국 무기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쇠퇴하였다. 일부 소규모 사채업자들의 광산 경영 역시 자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결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 1651년의 설점수세법(設店收稅法)이었다. 이 법은 영세한 광산의 전업적인 소생산자들을 광산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호조가 은광의 채굴제련장과 부대시설까지 마련해주면서 부근의 재목과 연료를 채취할 수 있게 하고, 광군들을 임의로 고용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대신 호조는 일종의 수세청부업자인 별장을 파견하여 광군수에 기준하여 1인당 연간 5전(錢)씩 세금을 거두었다. 이것이 호조 별장에 의한 설점수세제이다.

이에 따라 개인에 의한 광산 개발이 촉진되었다. 특히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은화의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평안도 단천과 경기도의 파주·교하의 은광이 유명하였다. 하지만 이 설점수세제도 호조에게 은점 운영권을 빼앗긴 군영문의 반발과 실질적으로 은점을 운영하고 있던 두목, 점장, 광군들이 지방 토호나 부호들과 결탁하여 사채 또는 잠채를 감행하면서 1775년 수령수세제로 변화하였다. 수령수세제는 물주가 호조의 설점허가를 받아 자기 자본으로 점소(店所)를 설치, 운영하고 해당 지역의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수납하는 제도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물주제 하의 광업 경영 형태가 금광·은광 및 동광업에 적용되었다. 특히 이 시기 사금광은 전국 각지의 하천에서 개발되고 있었다. 수령수세제하의 광산 경영은 물주가 채굴·제련시설과 운영자금을 투자하고 혈주(穴主)나 덕대가 직접 광산을 경영하였다. 혈주나 덕대는 설점 때에 동참한 사람들과 함께 광군들을 고용하여 분업적 협업 하의 광산 채굴을 주관한 실질적인 경영자였다. 광산에 고용된 광군들은 대체로 농촌에서 유리된 전업적인 광산노동자들로서, 광산의 규모에 따라 100여 명 또는 수천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광업 특히 금은광의 개발이 호조 별장수세제로부터 수령수세제로 넘어가는 시기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잠채’가 매우 성행하였다. 잠채는 물주, 혈주, 덕대처럼 광산 경영에 직접 참가하는 주역들이 행한 것은 물론이고 광군이 불법적으로 채굴하는 소규모 행위도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다.

한편 인삼의 불법 채취를 의미하는 잠채는 대체로 산삼 즉 자연삼의 채취를 말하며 지역적으로는 의주, 초산, 강계 등 압록강 연안 지역에서 일어났다. 특히 폐사군 지역처럼 인삼을 보호하여 기르도록 한 지역에 들어가 몰래 채취하는 경우는 불법적 잠채로 문제시 되었다. 시기적으로는 자연삼이 절종되는 17세기 중반 이후 많이 나타난다. 행위의 주체는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인삼을 잠채하는 행위와 그 반대인 경우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모두 인삼무역의 부가가치가 높은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제전서(弘齋全書)』
  • 『중경지(中京誌)』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 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 차수정, 「조선후기 인삼무역의 전개과정-18세기초 삼상의 성장과 그 영향을 중심으로-」, 『북악사론』1, 1989.
  •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