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설차(雀舌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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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이 마치 참새 혀와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차.

개설

차(茶)나무의 어린 순이 돋기 시작하여 참새[雀] 혀와 같은 모양이 되었을 때 채취하여 덖어서 만들었다고 하여 작설차(雀舌茶)라 한다. 봄철의 곡우(穀雨) 전후가 바로 찻잎이 이 모양을 갖추는 시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작설차를 고다[苦茶], 산차(散茶)라고도 불렀다. 조선에서 2월에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물품이었다.

내용 및 특징

작설차는 어린잎을 따서 구증구포(九蒸九曝)하여 만든다. 경칩과 곡우 사이에 찻잎이 자줏빛을 띠면서 참새의 혀와 같은 모양이 되면 3개가 달린 찻잎을 따서 덖고 비비고 말리기를 9번 하여 차를 만든다.

작설차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상도 8곳과 전라도 13곳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에서 작설차는 명(明)나라의 사신 대접과 금나라에 세폐(歲幣)에 반드시 들어가는 교역품이었다(『태종실록』 2년 5월 20일)(『세종실록』 9년 10월 30일)(『세조실록』 2년 7월 19일)[『성종실록』 즉위 12월 2일 3번째기사](『인조실록』 14년 2월 4일). 특히 성종대 이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인조대 영접도감(迎接都監)에 의하면 사신 접대에 왕이 몸소 참석할 때는 은병(銀甁)·은다시(銀茶匙)·은대야(銀大也)·인삼차(人蔘茶)를 사용하고, 재추(宰樞)가 대행할 때에는 주로 유기(鍮器)·사기(沙器) 그리고 작설차를 썼다고 하였다.

궁의 연회나 의례에서는 반드시 차를 올리는 의식이 빠지지 않았다. 고종의 오순(五旬)을 축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준비한 『신축진연의궤(辛丑進宴儀軌)』에서 중화전(中和殿) 진연(進宴) 시 대전에 올린 차는 작설차를 태의원(太醫院)에서 달여 대령하였는데 은다관(銀茶罐)·은다종(銀茶鍾)은 대내에서 내리고, 황칠 소원반은 탁지부(度支部)에서 준비하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김창업(金昌業)이 아침부터 현기증이 몹시 나서 기동을 하지 못하였는데, 작설차를 마시고 조금 가라앉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청나라에서도 차를 즐겨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작설차는 “맛이 달고, 쓰며 독은 없다. 몸의 기(氣)를 내리게 하고, 소화를 촉진시킨다. 또 머리를 맑게 해 주고, 이뇨(利尿) 작용을 하여 당뇨를 치료하고, 화상으로 인한 독을 없앤다.”고 하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구급방(救急方)」에는 모든 독기를 없애는 데는 매번 세다(細茶) 즉 작설차와 백반(白礬) 3전씩을 가루 내어 새로 길어 온 물에 타 먹이면 곧 효력을 본다고 하였다. 버섯에 중독되어 토사(吐瀉)가 그치지 않을 때는 작설차를 가루로 만들어 새로 길어 온 물에 타 먹이면 신효(神效)하다. 또 하엽(荷葉)을 문드러지게 짓찧어 물에 타 먹인다고 하였다.

변천

작설차와 같이 잎차를 마시는 풍습은 조선초기에 정착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여말선초의 사회적 혼란 속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과 ‘청담학파(淸談學派)’를 중심으로 차를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고, 말차(抹茶)에서 잎차로 차 문화의 새로운 전통이 확립되었다.

차에 ‘작설(雀舌)’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이는 고려말의 이제현(李齊賢)으로 추정된다. 『익재집(益齋集)』에 실린 「송광화상이 차를 보내준 데 대하여 붓 가는 대로 써서 장하에 보냈다[松廣和尙寄惠新茗順筆亂道寄呈丈下]」라는 차시[茶詩]에서 봄볕에 말린 작설이 기록되어 있다.

‘작설차’라는 차명을 구체적으로 명기한 이는 고려말에 은둔 생활을 했던 운곡(耘谷)원천석(元天錫)으로 추정된다. 그가 『운곡행록(耘谷行錄)』에 실은 「아우 이선차 사백의 차 선물에 사례함[謝弟李宣差師伯惠茶]」이라는 시에 작설차가 나온다.

아련한 서울소식 숲속 집에 이르렀는데 / 惠然京信到林家

가는 풀로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 細草新封雀舌茶

식사 뒤의 한 사발은 언제나 맛있고 / 食罷一甌偏有味

취한 뒤의 세 사발은 그저 그만이네 / 醉餘三椀最堪誇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앙금도 없고 / 枯腸潤處無査滓

앓는 눈 열릴 때에 현기증도 없어지네 / 病眼開時絶眩花

이 물신(物神)의 공덕 시험하여 측량하기 어렵고 / 此物神功誠莫測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무마(睡魔)가 멀어지네 / 詩魔近至睡魔賖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작설(雀舌)」이라는 시에서 작설차의 효능을 읊었다.

남쪽나라의 봄바람이 일렁일 때 / 南國春風軟欲起

차나무 숲 잎들은 뾰족한 부리 내밀면 / 茶林葉底含尖觜

기창 사이에서 자줏빛 싹을 가려내어 / 紫筍抽出旗槍間

차로 마시면 두 눈이 밝아진다 / 啜雲膄雙眼明

서거정(徐居正)은 『사가집(四佳集)』에서 잠상인(岑上人)이 작설차를 준 데에 대하여 사례한 시에서 찻잎의 모양을 봉황의 혓바닥 같다고 표현하였다.

가슴을 상쾌히 하매 큰 공훈이 많고말고 / 開襟爽懷多奇勳

상인이 멀리 홍진 속에 분주한 이 사람이 / 上人遠念紅塵客

십 년을 길이 소갈증 앓는 걸 염려하여 / 十年臥病長抱渴

계림의 눈빛 같은 하얀 종이로 싸고는 / 裹以鷄林雪色紙

용사 같은 두세 글자를 써서 봉하였네 / 題封二三龍蛇字

봉함 뜯으니 낱낱이 봉황의 혓바닥 같아 / 開緘一一鳳凰舌

살짝 볶아 곱게 가니 옥가루가 날리어라 / 輕焙細碾飛玉屑

아이 불러 이내 다리 꺾인 냄비를 씻고 / 呼兒旋洗折脚鐺

맑은 눈물에다 생강 곁들여 달이노라니 / 雪水淡煮兼生薑

이렇듯 이제현, 원천석, 김시습, 서거정에 이어 차를 즐겨 다산(茶山)이라는 호까지 붙은 정약용(丁若鏞) 등 차 애호가들은 작설차를 즐기며 다수의 차시를 남겼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의보감(東醫寶鑑)』
  • 『매월당집(梅月堂集)』
  • 『사가집(四佳集)』
  • 『산림경제(山林經濟)』
  • 『신축진연의궤(辛丑進宴儀軌)』
  • 『연행일기(燕行日記)』
  • 『운곡행록(耘谷行錄)』
  • 『익재집(益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