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장(自擊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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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격루(自擊漏)를 만드는 일을 하던 관상감(觀象監)의 공인(工人).

개설

자격장(自擊匠)은 조선시대 궁중에 설치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의 공작을 맡은 장인(匠人)을 말하며, 이들은 모두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자격장은 조선시대 천문과 지리를 담당하던 관상감에 소속되었으며 정원은 10인이었다.

내용 및 특징

자격장은 자격루의 시간을 직접 치거나 또는 자동으로 자격루를 치는 동자인형(童子人形)의 장치를 제작하던 기술자로 정원은 10인이었다.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 5월에 장영실(蔣英實) 등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데, 나무 인형이 장치되어 있어 시각에 따라 자동으로 번갈아가며 종과 북, 정(鉦)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되는 자격루를 항상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격장들이 필요하였다.

자격장은 종9품의 체아직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물품을 만들던 장인의 총칭이기도 했다. 당시 공장(工匠)은 대부분 공조(工曹)를 비롯한 중앙 관아에 매여 있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관아 소속의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풍물장(風物匠)이나 황엽장(簧葉匠), 그리고 군기시(軍器寺) 소속의 고장(鼓匠)은 모두 경공장으로서 악기를 제조하는 기술자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9품의 공장은 2원으로, 1원은 제색장(諸色匠)으로 체아직이고, 1원은 관상감의 자격장으로 체아직이라고 되어 있다.

중종대에 자격장 중에 박세룡이라는 인물은 정교한 솜씨로 유명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항상 보루각에 머물게 하였다(『중종실록』 31년 4월 9일). 보루각의 시각을 알리는 종이 고장이 날 경우 시각을 알려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박세룡에게 보루각의 종을 보수하여 시간이 흘러도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만들도록 하였다. 보루각을 보수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어서 신분의 제약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박세룡의 경우 장례원(掌隸院)의 공노비(公奴婢) 출신이었는데, 장영실처럼 특별한 기술이 있어 보루각에 영원히 소속되어 자격장 일을 맡았다.

변천

자격장은 조선시대 잡직에 해당된다. 잡직은 국가와 왕궁의 특수한 일을 맡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잡직을 맡은 계층은 사족과 달라 천시되었고, 급여는 4도목의 체아(遞兒)로 지급되었다. 세종 때 천인과 구별하기 위해 잡직계를 마련하였고, 잡직 양인은 문산계나 무산계를 받았다. 조선의 잡직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건국 초기에 궁궐·성곽의 조성 등 대역사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으므로 공장 인력은 항상 부족하였다. 즉, 양인 신분의 역(役)만으로는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장인을 가진 관아는 국방 무기를 제작하는 군기시였는데, 그 인원이 644명이었으며, 쇠를 제련하는 연장(鍊匠) 202인, 쇠를 단련하는 야장(冶匠) 190인, 활을 만드는 궁인(弓人) 150인, 활촉을 만드는 시인(矢人) 90인, 갑옷을 짓는 갑장(甲匠) 35인, 무쇠를 다루어 무기를 만드는 주장(鑄匠) 20인 등 모두 중장비인 무기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주로 쇠를 다루는 군기시 장인 중에서 보루각의 종을 다루는 기술 장인으로 자격장이 차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유승원, 『조선초기 신분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7.
  • 최이돈, 「조선초기 잡직의 형성과 그 변화」, 『역사와 현실』5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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