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도설(入學圖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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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학자 권근(權近)이 1390년(공양왕 2) 초학자 교육용으로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

개설

『입합도설(入學圖說)』은 권근(1352~1409)이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에 유배되어 있던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초학자 교육용으로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다.

『입학도설』은 총 40개의 도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 절반이 넘는 23개 도설의 내용은 권근의 다른 경학 저술인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입학도설』의 오경 관련 도설들을 검토해 보면, 그 내용이 『대학』의 3강령ㆍ8조목, 『중용』의 천명(天命) 등과 연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이 도설들이 비록 전거는 오경에 두고 있지만, 실상은 『대학』ㆍ『중용』의 핵심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편찬/발간 경위

권근은 익산에 유배하는 동안 책의 체재를 갖추고, 주요 도설들을 만드는 등 이 책의 초고를 작성하였고, 1390년 11월 유배에서 풀려나 충주 양촌에 은거한 이후 초고에 대한 보완과 정리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권근이 1393년(태조 2) 3월 재출사할 때까지 이 책의 보완ㆍ정리는 마무리되지 못했고, 뒷부분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권근이 은거하는 중에 보완ㆍ정리가 마무리된 부분은, 필사본으로 통용되다가, 1397년(태조 6) 김이음(金爾音)에 의해 진주에서 먼저 간행되었다. 그리고 1397년 간행에서 빠졌던 부분은 권근 사후 아들 권도(權蹈)와 문인 변계량(卞季良) 등에 의해, 1425년(세종 7)에 간행됐는데, 이 때 앞서 간행된 부분도 함께 간행되면서, 『입학도설』은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3.4cm, 가로 19.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입학도설』은 조선 전기 유학자 양촌(陽村)권근(權近)이 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이다. 『입학도설』은 제자 김반이 『속입학도설(續入學圖說)』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이 쓴 『천명도설(天命圖說)』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후대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책은 전집 단간본과 전ㆍ후집 합간본 두 가지가 있다. 권근은 1368년(공민왕 17)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 개국에 공이 커 개국 공신에 봉해졌다. 『입학도설』은 전집에 『천인심성합일지도』 등 26종, 후집에 『십이월괘지도』 등 14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입학도설』의 각 도설들은 권근 경학(經學)의 중심 이론인 ‘천일합일론(天人合一論)’의 체계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와 ‘천인심성분석지도(天人心性分釋之圖)’에서는 천인합일의 이론적 측면을 종합ㆍ정리했고, 이후 도설에서는 경전 내용을 바탕으로 천인합일의 논리를 부연하여, 앞의 두 도설을 뒷받침했다. 특히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에 관한 도설들은 천인합일의 주체와 방법 및 그것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천인합일론의 실천적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받고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태극(太極), 천명(天命), 이기(理氣), 음양(陰陽), 오행(五行), 사단(四端), 칠정(七情)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 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입학도설』은 1425년(세종 7) 경상도 진주에서 출간된 목판본으로 이미 앞서 저술된 전집과 후집을 합본하여 간행된 1책이다. 당대 유학자로 대표되는 정도전(鄭道傳)이 1398년에 서문을 쓰고, 1425년에 권근의 문인 춘정변계량(卞季良)이 발문을 지었다. 발문에 따르면 당시 경상감사의 협조로 봉상시주부정척(鄭陟)에게 글을 쓰게 하였다고 한다. 발문 뒤에 간행에 참여한 사람의 관직명과 성명, 각수(刻手)의 이름도 있다.

조선 성리학의 비조는 길재(吉再, 1353~1419)다. 물론 고려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과 정몽주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려조의 인물이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은 길재다. 조선 성리학의 대성자인 퇴계이황까지의 도통을 살펴보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이황’으로 되어 있다.

길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양촌권근(權近, 1352~1409)이다. 권근은 길재의 스승이다. 권근은 15살에 성균관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18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나서 한 2년간 귀양살이를 했지만, 이성계가 왕이 된 이후 대제학을 위시한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태종의 셋째 딸 경안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생전에 부귀와 영화를 두루 누렸다.

길재의 제자 중 일부는 관직에 나아가 조선조 국가건설에 기여하기도 하고, 일부는 재야에서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권근은 길재가 비록 제자이긴 하나 그를 외우(畏友)로 대하고, 만년에는 길재의 지조를 높여 선생이라고 칭하기도 하였으며, 길재는 비록 한 살 차이이긴 하나, 권근을 스승으로 대하고 권근이 죽은 후 심상(心喪)을 3년까지 입었다. 그러나 후세의 학자들은 양촌이 절개를 잃었다고 하여 결코 그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그 수많은 서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촌은 서원 제삿밥 한 번 먹어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촌은 조선의 창업을 반대해 죽음을 당한 정몽주를 추증하고, 길재가 살던 마음에 정문을 세워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기를 건의하였다.

의의와 평가

권근 자신은 초학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라 하였으나, 『입학도설』은 그림으로 성리학의 개념을 쉽게 파악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게 저술되어,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그림으로 설명하는 이른바 ‘도설(圖說)’의 시초가 되는 저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책은 한국의 사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강문식, 「『입학도설』의 편간 경위와 경학론」, 『장서각』 제29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 김평원, 「우리 선조들의 교과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이미지 학습」, 『교과서연구』 통권 제46호, 한국교과서연구재단, 2005.
  • 김평원, 「전통 교과서의 시각화 전략에 대한 연구: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중심으로」, 『선청어문』 제35집,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2007.
  • 정대환, 「『입학도설』을 통해 본 권근의 성리학」, 『범한철학』 제26집, 범한철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