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용(任昭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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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31)~1628년(인조 6) = 31세].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대사성을 지낸 임몽정(任夢正)이고, 어머니는 임몽정의 첩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임국로(任國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황주목사(黃州牧使)임윤(任尹)이다.

광해군의 후궁

임소용(任昭容)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1610년(광해군 2) 외할머니의 연줄로 궁에 들어와 광해군의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의 첩지를 받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1 「폐주광해군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이후 소원(昭媛)을 거쳐 소용의 첩지를 받았다.(『광해군일기』 13년 4월 21일) 임소용은 자색이 있고 아첨을 잘 부려 총애를 받았으며, 왕이 임소용을 편히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광해군일기』 5년 9월 25일),(『광해군일기』 5년 12월 30일),(『광해군일기』 15년 3월 13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발하자 광해군의 후궁들은 사망하거나 중도부처(中途付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임소용은 광해군 대에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이 고변을 당할 때 두 사람을 옹호한 공을 인정받아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광해군의 유배지에서 그를 모시며 살았다.(『인조실록』 1년 9월 14일),[『연려실기술』 권23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이후 1628년(인조 6) <허유(許逌)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에 광해군이 연루되어 있다며 의금부에서 광해군을 체포하러 오자 임소용은 스스로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인조실록』 6년 1월 3일) 그리고 임소용은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시 31세였다.[『속잡록(續雜錄)』 권2 「무진년」상]

묘소와 후손

임소용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임소용은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사기문(逸史記聞)』
  • 『속잡록(續雜錄)』
  •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