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격(日意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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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으로 청국 해관의 세무사와 복주(福州) 조병창의 책임자를 역임한 인물.

개설

일의격은 지켈(Prosper Marie Giquel)의 한자식 표기이다. 프랑스 해군 장교로서 크림전쟁에 참전한 지켈은 애로호사건으로 제2차 중영전쟁이 발발하자, 영불 연합군의 일원으로 1857년에 광동 점령 전투에 참가하였다. 1861년에 지켈은 청국 해관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영파해관(寧波海關)의 세무사로 임명되었다. 영파 지역이 태평천국 세력이 점령한 지역이었기에, 지켈은 청국 군대와 프랑스 군대의 혼성군 편성에 참여해서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 데 활약하였다. 그 공로로 청국 정부는 지켈에게 총병(總兵)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지켈은 1864년부터 영파해관의 세무사로 근무를 하다가, 1866년에 복주에서 조병창을 창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1867년부터 1874년까지는 유럽인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조병창 근무 기간 동안 지켈은 서구의 해군 무기와 선박 관련 운송수단 기술을 청국에 전수하였으며, 청국인 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노력함으로써, 청국의 양무운동에 일조하였다. 1877년에는 청국인 기술 인력들을 인솔해서 프랑스 견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편 지켈은 1870년대 중반부터 1880년대까지 청국 관리들에게 외교 관련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1874년에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자, 지켈은 청국의 고문으로 청과 일본의 외교 교섭에 참여하였다. 1881년에는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청과 일본의 국경분쟁을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롭게 해결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883~1885년에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의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자, 지켈은 청불전쟁의 종식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1884년 8월에 프랑스 해군이 지켈이 창립 및 운영을 주도한 복주의 조병창을 파괴한 일은 지켈에게 큰 충격이 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1874년 4월에 일본은 대만인들이 표류한 유구인을 살해한 사건을 빌미로 대만을 침략하였다. 그런데 청국 언론에서 대만 침략 이후에 일본이 군대를 조선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전해졌으며, 그 소문은 연행사절단과 청국을 통해서 조선에 전해졌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국을 통하여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하였는데, 청국 예부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심보정(沈葆禎)이 지켈의 견해를 적은 서신을 조선 측에 전달하였다.

그 서신에 따르면 지켈은 일본이 대만 원정부대 이외에도 장기(長崎)에 5,0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데, 일본이 대만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 조선에 출병할 것이며, 미국과 프랑스가 일본을 도울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지켈은 청국이 미국이나 프랑스를 중재해서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수 없을 것이며, 혹시 일본이 군대를 조선에 출병해도 조선 자체의 방어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고종실록』 11년 6월 24일).

참고문헌

  • 『목종의황제실록(穆宗毅皇帝實錄)』
  • 『덕종경황제실록(德宗景皇帝實錄)』
  • 『나암수록(羅巖隨錄)』
  • 『동문휘고(同文彙考)』
  • 『용호한록(龍湖閒錄)』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5·16권, 1975.
  • Steven A. Leibo, A Journal of the Chinese Civil War, 1864 by Giquel, Prosper,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 Steven A. Leibo, Transferring Technology to China: Prosper Giquel and the Chinese Self-Strengthening Move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