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록(日省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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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

개설

『일성록(日省錄)』은 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까지 주로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다. 세손 시절부터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 기록한 정조의 『존현각일기』는 『논어』에서 증자가 말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는 글귀를 쫓아, 정조 자신이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책은 1783년(정조 7)부터 국왕의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施政)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 후에 왕의 재가를 받은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인 1752년(영조 28)부터의 언행과 동정을 일기체로 적고,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1779)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각신(閣臣)들로 하여금 왕이 조정에서 행한 갖가지 사실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것을 자료로 하여 1783년부터 작성을 시작해 1785년 1월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이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규장각의 책임관원에게 맡겨, 이 편찬체제를 이어 나가게 하였는데, 현재는 1790년(정조 14)부터의 기록만 남아 있다.

서지 사항

2,329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책의 구성은 ‘천문류’ㆍ‘제향류’ㆍ‘임어소견류’ㆍ‘반사은전류’ㆍ‘제배체해류’ㆍ‘소차류’ㆍ‘계사류’ㆍ‘초기서계별단류’ㆍ‘장계류’ㆍ‘과시류’ㆍ‘형옥류’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일성록』은 왕의 입장에서 편찬한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기록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문화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정조에 의하여 기록되기 시작하여, 그 뒤 정부의 업무로서 계속 편찬되었다. 정조는 각종 기록을 집대성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여 국가의 의례에 이용된 문장, 과거의 답안, 신하들의 상소문 등을 종류별로 모아 책으로 엮게 하였고, 그 뒤로도 계속 증보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또한 정조는 각 관서의 일록(日錄)을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설치한 규장각의 경우에는 1883년(고종 20)까지 기록된 1,245책의 『내각일력(內閣日曆)』을 남기게 하였고, 비변사의 경우에는 그 업무를 내용별로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주모유집(籌謀類輯)』을 편찬해 가도록 하였다.

업무의 기록과 문헌의 정리에 대한 위와 같은 정조의 관심은 신하들에게만 강조된 것이 아니고, 매일 자신의 일을 기록하고 반성하는 데에도 철저하여, 많은 기록을 남겼다. 세손으로 있을 때는 직접 일기를 써서, 이를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라고 하였으며, 이밖에도 규장각도서에는 정조의 친필기록으로 추정되는 정사(政事)ㆍ강술(講述)ㆍ시사(試射)의 내용을 정리한 일기가 전하여지기도 한다.

정조의 일기는 즉위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781년(정조 5)에 규장각 신하들에게 일기를 쓰는 자신의 습관을 밝히고, 그 일기를 『승정원일기』와 구별되는 공적인 기록으로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혔다. 이때 제목을 ‘일성록’ 또는 ‘월계록(月計錄)’이라 하고 그것을 합하여 ‘일월통편(日月通編)’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와 같은 제목의 책이 예전에도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 뒤 결론이 어떠하였는가는 확인할 수 없다. 같은 해 12월에 ‘규장각신 심염조(沈念祖)와 병조판서정창성(鄭昌聖)이 왕명을 따라 『일성록』을 교정하였다.’는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에 ‘일성록’이라는 명칭이 결정되고, 그 저술이 공식사업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중의 ‘군서표기(群書標記)’의 기록에 1783년부터 국무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직접 기록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져서, 규장각신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1781년의 정리 작업은 지나간 기록에 대한 것이었으며, 매일의 일을 신하들이 기록하는 체제로 들어간 것은 그 2년 뒤부터인 듯하다.

『정조실록』 1785년(정조 9) 5월의 기사에는, 신진 관원이 작성하는 기록에는 잘못이 많으므로, 근신(近臣)인 규장각신으로 하여금 경전에 대하여 토론하거나, 정사를 처리한 내용을 정리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규장각이 정비되어가는 것과 짝하여, 규장각신이 중심이 되어, 『일성록』의 편찬작업이 행하여져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7월에는 임금의 일상을 기록한 기거주(起居注)에 실린 각 관서의 장고(掌故)와 『존현각일기』에 실린 기록을 토대로 하여, 규장각신ㆍ승지ㆍ홍문관원 등이 1752년(영조 28) 정조가 탄생한 해부터 『존현각일기』가 쓰이기 이전까지의 기사를 날짜별로 강(綱)과 목(目)을 세워, 『일성록』을 편성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 와서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되고, 『존현각일기』가 작성되기 시작한 이후뿐만 아니라, 그 일생 전체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일성록』의 제1책으로 장정되어 있는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정조가 직접 쓰는 개인 일기로 출발한 『일성록』은 차차 그 기록 방식과 담당자가 변화되고 정리되어 갔으며, 이후 정부 공식 기록으로서의 위치를 튼튼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복원의 서문에는 1752년 정조가 탄생한 해부터 1785년까지 100여권이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으며, ‘군서표기’의 기록에 따르면 1752년부터 1800년까지의 정조의 생애에 대하여 670여 권이 작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정조의 『일성록』이 정조가 8세 때인 1760년부터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670여 권이라는 숫자에 해당하는 것을 볼 때 정조 탄생 이후 1759년까지의 기록은, 후일의 기록만큼 내용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까닭에 이미 정조 연간에 전체 『일성록』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그 형식이 일기인 만큼 날마다의 생활을 반성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정조 자신이 그의 일기를 생활을 반성하고, 심력(心力)을 살피는 자료로 삼고 있음을 매우 강조하였으며, 이복원의 서문에서는 ‘증자(曾子)가 ‘매일 스스로를 세 번 반성한다(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고 한 것과 자하(子夏)가 ‘날마다 모르던 바를 알고, 달마다 잘하는 바를 잊어버리지 않는다(일지기소망 월무망기소능(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라고 한 뜻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런 점에서 군왕으로서의 수양과 정치의 모범을 본받기 위하여 편찬한 영조의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에서 ‘성(省)’을 따왔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한편 정조는 그의 일기를 후대에 길이 전하려는 의도를 직접 표명하는 데 나타나는 바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기록을 통하여 정당화할 필요를 느꼈으리라고 생각된다.

조선 말기를 서술한 국가의 역사기록으로서의 중요성 외에도 『일성록』은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동서양 간의 정치와 문화의 교류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세계적인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다.

참고문헌

  • 유승희, 「정조대~철종대 한성부 사형범죄의 실태와 민의 갈등양상 - 『일성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41, 조선시대사학회, 2007.
  • 유승희, 「「일성록」 형옥류에 나타난 사죄 기록의 고찰」, 『서지학연구』 제38집, 한국서지학회, 2007.
  • 전해종, 「일성록해제」, 『일성록』 1,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2.
  • 최승희, 「1873년 일성록의 일부 소실과 개수」, 『규장각』1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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