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번내금위(一番內禁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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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호위와 입직(入直)을 담당하던 금군 가운데 내금위 1번(番)의 군인.

개설

내금위는 1407년(태종 7)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와 함께 금군삼청 또는 내삼청(內三廳)으로 불렸다. 금군은 1666년(현종 7) 700명으로 액수가 정해졌고 7번으로 운영되었는데, ‘내금위 1·2·3번, 겸사복 1·2번, 우림위 1·2번’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내금위 1번이 일번내금위이며, 왕의 호위와 입직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일번내금위장은 별장(別將)이 병 등의 사유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별장을 겸임하여 입직한 금군을 통솔하였으며 왕을 호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봄과 가을의 활쏘기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하면 상을 주었는데, 1788년(정조 12) 가을에 시행된 활쏘기 시험에서 일번내금위 출신 성동일이 유엽전(柳葉箭)과 편전(片箭)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내 상으로 품계를 올려 주었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은 용호영으로 개편되었고, 금군의 수는 정조대에 600명으로 줄었다가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철폐된 후 100명이 금군에 이속되어 700명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년) 용호영이 친군통위영에 통합되고, 같은 해 총위영도 혁파되는 가운데 일번내금위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정조는 일번내금위를 겸사복과 함께 선천과(宣薦窠)로 정하여, 전함(前銜)·출신(出身)·한량(閑良)을 막론하고 재주에 따라 선발함으로써 군인이 장비를 잘 정돈하게 하고 군대의 위용도 엄숙하게 하려 하였다. 일번내금위는 정3품 내금위장 휘하에 100명이 설치되었는데, ‘종8품 내금위정 3명, 종9품 내금위령 9명, 일번내금위 88명’이었다.

일번내금위는 왕의 호위와 입직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는데, 특히 일번내금위장은 별장이 병이나 무과의 시관(試官)이 되어 나가는 등의 이유로 왕의 호위를 담당하지 못할 경우 별장을 겸임하여 입직한 금군을 인솔하여 왕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입직은 일번내금위의 주요 임무였다. 때문에 1679년(숙종 5) 아프지 않은데도 병을 핑계로 입직하지 않은 홍여준을, 숙위(宿衛)가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입직을 빠졌다는 이유로 잡아 가둔 다음 단죄(斷罪)하도록 하였다.

변천

내금위는 1407년 설치되었다. 1409년 내시위가 내금위에 병합되면서 내금위는 금군의 핵심이 되었으며(『세종실록』 6년 5월 6일),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삼청 또는 내삼청으로 불렸다. 1666년(현종 7) 금군의 정원이 700명으로 정해졌고 7번으로 운영되었는데, 그중에서 내금위 1번이 일번내금위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은 용호영으로 개편되었고, 정조대에 600명으로 줄어들었던 금군의 수는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철폐됨으로써 100명이 이속되어 700명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용호영이 친군통위영에 통합되자 일번내금위장은 영관으로 대체되었고, 같은 해 총위영이 혁파되는 가운데 일번내금위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부역실총(賦役實總)』
  • 『호서읍지(湖西邑誌)』
  • 차문섭, 「선초의 내금위에 대하여」, 『사학연구』18,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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