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협상(日露協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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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결과 조선에서 영향력이 감소하자 러시아 정부와 외교적 타협을 통해 조선 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맺은 협상.

개설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주도하면서 조선의 동학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게 되자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친일파가 단발령과 을미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반일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 정객들이 자행한 명성황후 살해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하여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반면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 정국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러시아와 외교적 접촉을 지속하였고, 양국은 암묵적으로 한시적이나마 조선에서 무력 충동을 예방할 수 있는 협상에 합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95년 4월 17일 하관(下關)에서 청나라의 전권공사리홍장과 일본의 전권공사인 총리대신이등박문(伊藤博文) 사이에 맺어진 강화조약으로 청일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요동반도의 할양을 반대하는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에 의한 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러시아가 조선 왕실과 정부에 친러파를 구축하자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강수를 두면서 이에 반격을 가했다. 그렇지만 러시아·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에 대한 불간섭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는 국제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세력이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일본 세력을 다시 회복하려고 기도한 것과 달리 국제적 비난과 압력은 물론 조선의 조야에 반일운동을 유발시켰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 정략이 도리어 수포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고종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아관파천이 이루어지자 친일 김홍집내각은 붕괴되고 정동파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러협상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내용

러시아 정부는 아관파천 전까지 조선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러시아의 주요 관심사는 만주에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로 연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관심은 만주로 집중되었다.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몰아낸 러시아는 조선에서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 양국 간에는 교섭이 두 차례 진행되었다. 1차 러일협상의 결과가 1896년(고종 33) 4월 15일 서울에서 러시아공사웨베르와 조선 주재 일본공사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 사이에 체결된 각서(覺書, [Memorandum])였고, 2차 러일협상의 결과가 6월 9일 모스코바에서 체결된 외상로바노프와 산현유붕(山縣有朋)의 의정서(議定書, [Protocol])였다.

이들 협약의 내용은 아관파천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양국 간에 고종의 신변 문제와 정치 등에 관해 관여하는 것을 서로 제한하는 일시적이고도 잠정적인 타협이었다. 이런 사실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인지하지 못했다. 러시아 정부는 조선의 보호자 역할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고종이 요청한 한국 내각의 고문이나 군사 교관 문제를 기각하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만주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한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만주 방면으로 확장하기로 결심한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당시 군사력이 러시아에 대적할 수 없었으므로 정면충돌의 위험을 회피하면서 타협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가 두 차례의 러일협상이었다.

1차 러일협상에서 웨베르와 고무라의 각서는 조선 각지를 점령한 일본군의 철수를 의미하였다. 러시아는 4개 도시에 일본 군인 수에 초과하지 않는 수의 위병을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내용은 그런 협상의 주요 내용이 누락된 채 1)일본과 러시아 양 대표는 조선 왕에게 환궁을 충고할 것, 2)일본과 러시아 양 대표는 조선 왕에게 온화한 인물로 각신(閣臣)을 임명하고 너그럽고 인자한 태도로 신하와 백성들을 대하도록 권고할 것이라는 내용이다(『고종실록』 33년 5월 14일).

2차 러일협상은 1896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서였다. 일본에서는 군부를 대표하는 산현유붕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러시아와 협상하였다. 6월 9일 체결된 로바노프와 산현유붕의 의정서는 한반도 분할 문제와 조선의 군사 및 재정에 대한 양국의 간섭 정도를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러일협상과 동일하게 주요한 내용은 없고 조선문제의정서(朝鮮問題議定書)라는 제목하에 1)일본과 러시아 양국 정부는 조선의 재정에 관하여 충고하고 합의하여 원조를 줄 것, 2)조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군대와 경찰을 창설하고 이것을 유지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고종실록』 33년 6월 9일). 『고종실록』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상기할 때 러일협상의 주요한 부분이 누락된 것은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사료된다.

변천

1905년(고종 42)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일협상을 폐기하고 새로운 협정으로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와다 하루키,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J&C, 2011.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A. 말로제모프, 석화정 역,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2002.
  • 배항섭, 「朝露 수교(1884) 전후 조선인의 러시아관」, 『역사학보』194, 2007.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