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仁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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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인천부를 관할하던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樹州: 현 인천 부평)에 소속되었고,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지인주사(知人州事),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해인 1392년(태조 1)에 옛 이름인 인주(仁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문종부터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이 인주 출신 왕비가 나와서 여러 차례 승격된 것이다. 1394년(태조 3)에 경기를 좌·우도로 나눌 때 좌도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인천군(仁川郡)으로 개칭되었으며, 1459년(세조 5)에 도호부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인천군이 되었으며, 1896년(고종 33)에 경기도에 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인천부는 고려 때인 1390년에 경원부라는 이름으로 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때인 1459년(세조 5)에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는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부(府)에는 3품 이상의 사(使) 1명, 4품 이상의 부사(副使) 1명, 6품 이상의 판관(判官) 1명, 7품 이상의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 1명, 8품 이상의 법조(法曹) 1명, 9품의 의사(醫師) 1명과 문사(文師) 1명이 있었다. 이들 관원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하였는데, 1116년(고려 예종 11)에는 대도호부·목의 판관을 고쳐 통판(通判)이라 하였고, 뒤에는 사·판관·사록만을 두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목과 도호부의 지관(知官)인 사·부사는 모두 경관(京官)을 겸직하지 않게 하였다. 1375년(고려 우왕 1)에 목과 도호부의 지관(知官)은 모두 병마사를 겸임시켰다. 부사(副使: 한자 중복 삭제)는 도호부사를 보좌하고 도호부사 부재 시 그 임무를 대신하였다. 판관은 군현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부서 간 업무를 원활하게 조절, 통제하면서 수령에게 보고하는 실질적인 2인자였다. 사록의 업무는 군사는 물론 조세·사역·향리 통제·속읍 순찰 등이었다. 장서기는 표문·하표(賀表) 등을 작성하고, 아울러 군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업무 기록을 작성하였는데, 목과 도호부에서는 사록겸참군사가 겸직하였다. 법조는 재판과 관련된 실무와 법률자문을 하여 조선시대의 검률(檢律)에 해당하는 직책이었고, 의사와 문사는 질병 구제와 교육을 전담하는 속관이었다.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인천부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와 종6품의 교수(敎授) 1명이 있었다. 교수는 지방 향교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부와 목에 두었으나 무록관(無祿官)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자치규약인 향약 등이 활발하게 운영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종3품의 부사(府使)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을 두었고, 군관·아전 등은 본래 정해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에는 4~5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인천부는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에 소속되었다. 예종 때 시중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인종을 출산하였으므로 인주로 승격되었으며, 숙종 때 문종의 비이고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仁睿王后)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군으로 승격되었다. 인종 때 예종의 비이고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順德王后)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지주사(知州事)로 승격되었으며,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경원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해인 1392년(태조 1)에 인주로 이름을 복구하였으며, 1394년에 경기를 좌·우도로 나눌 때 좌도에 소속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군(郡)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산(山)이나 천(川) 자로 고쳤는데, 이때 인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459년(세조 5)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외향이라 하여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세조실록』 5년 11월 5일). 1526년(중중 21)에 수원진(水原鎭)이 폐지되어 인천부에 소속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승려 여환(呂還) 등이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인천군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속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인천(仁川)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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