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양전(仁陽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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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내전으로 주로 왕실의 내연(內宴)을 행하던 전각.

개설

성종은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창건하였다(『성종실록』 14년 3월 3일).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지만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으로 창덕궁과 연결되어 주거 공간 및 연회 공간, 상장례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성종 연간에 대비의 거처로 활용하기 위해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때 건립된 인양전도 대비전과 함께 연회를 베풀 때 왕실의 내명부와 종친(宗親)의빈(儀賓)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성종실록』 17년 10월 16일).

위치 및 용도

인양전이 있던 곳은 현재 함인정(涵仁亭)이 위치하는 곳이다. 명정전(明政殿)의 서쪽, 환경전(歡慶殿)의 남쪽이다. 건립 초기에는 종친을 위한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이후 주로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밤 대궐 안에서 마귀와 잡신(雜神)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儺禮)를 관람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10월에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이곳에서 육촌 이내의 친족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고, 같은 해 11월 5일 2품 이상의 종친과 의빈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11월 19일에 또다시 종친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1486년부터 1503년(연산군 9)까지 12월 29일, 섣달그믐이 되면 왕은 대비와 함께 거의 매년 인양전에서 나례를 구경하였다. 여기에는 종친과 관원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창경궁의 여러 전각이 소실되면서 인양전도 사라졌다. 이후 1616년(광해군 8)에 창경궁 재건 공사가 진행되면서 인양전도 다시 중건되었다(『광해군일기』 8년 5월 9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창경궁의 내전인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환경전 등이 소실되면서 인양전도 함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의 함인당(涵仁堂)을 인양전 터에 옮겨 세우고 함인정이라 이름을 고쳤다.

현재 창경궁에는 명정전의 서쪽, 환경전의 남쪽에 함인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대규모 연회를 베풀던 인양전의 터에 세워진 함인정 남쪽 마당은 매우 넓어서, 영조 연간에는 이곳을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연산군은 인양전을 화려하게 고쳐 지었다. 1504년(연산군 10) 인양전이 협소하다며 놀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높고 크게 짓는 공사를 시작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19일). 6월 25일이 대비의 생일이므로 이날의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인양전에 가가(假家)를 짓되, 그 규모를 1,000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짓도록 하였다. 또 인양전 앞마당에는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비가 올 것을 대비하였다. 장랑을 만드는 데 많은 공력이 들어갔으나 잔치가 끝나자 바로 허물었다고 한다.

1505년(연산군 11) 5월에는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를 위한 진연을 열었는데, 그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한 상의 음식을 만드는 데 든 비용이 밀가루 40여 석이나 되었으며, 비단으로 꽃[綵花]을 만들어 꽂고 금은으로 꾸며서 정교하고 화려함을 다하였고, 진연에 참여한 인원에 여자는 280여 명으로 인양전 뜰에 들었고, 남자는 1,000여 명에 이르며 양화문(陽華門) 안에 들었다고 한다. 연회 이후 연산군 또 다시 인양전을 개축할 뜻을 밝혔다. 창경궁이 세 명의 대비전을 위해 세운 것이므로 하례를 받는 일이 있는데, 정전을 헐어 새롭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짓겠다고 하였다. 이때 청기와를 올리고자 청기와를 구웠으며, 금을 사용하여 단청하고자 금 10여 근을 준비하였다. 후원에는 서총대를 쌓았는데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고 1,000명이 앉을 만큼 넓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1506년(연산군 12) 9월,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