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소(印曆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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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발간한 역서(曆書)의 관리를 맡은 기구.

개설

조선후기에 역서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오르게 되었는데, 인력소(印曆所)는 관상감에 적을 두었던 관리들이 재화를 불리기 위해 사적으로 역서를 매매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1766년에 관상감 영사홍봉한 등이 주도하여 만든 역서 관리 기구이다.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었으며, 시헌력을 비롯한 조선후기 역서를 관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에 역서를 찾는 수요가 늘면서 역서의 매매가가 올랐고, 이에 따라 역서의 인쇄량이 대폭 증가하였다. 또한 관상감에서 찍어낸 역서 중 공적인 것 외에 사건(私件)으로 발행한 역서들은 관상감 관원들이 매매하여 이득을 챙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관상감에 적을 둔 자가 역서를 마음대로 매매하거나 심지어는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으로 사인(私印)하는 등 문제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오늘날의 농산물 가격처럼 해마다 역서의 가격이 너무 싸거나 반대로 폭등하는 등 불안정할 때가 많았고 이는 곧 역서 관리의 부실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역서의 발간 수량이 1만 축 이상으로 대폭 증가하게 된 것은 불안정한 역서 가격의 안정화를 도모할 목적이 가장 큰 이유였으며, 이에 증가한 역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기구가 요청되었다. 관상감에 소속된 일과청(日課廳)에서 역서의 발간과 관리를 맡았으나, 왕에게 올리는 역서와 왕이 하사하는 역서 외에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1766년(영조 42)에 창설된 인력소는 발행된 역서의 관리와 가격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관상감 영사홍봉환과 관상감 제조윤급(尹汲) 등이 역서의 가격 안정을 위한 방책을 강구하여 인력소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인력소에서는 인출소(印出所)에서 인출한 역서 가운데 왕에게 올리는 것과 왕이 하사하는 것 이외에 관상감에서 사유(私有)한 것을 관리하였다. 인력소에서 역서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관상감 관원 등 개인이 역서를 몰래 인출하거나 매매하기는 어려워졌으며 법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만약 몰래 역서를 인출했을 때는 위조인신율(僞造印信律)에 의거하여 처벌받았다. 인력소의 설치로 수요와 공급이 맞춰져 인쇄할 역서의 수량도 체계적으로 조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인력소는 인력청에서 제작한 역서를 관리하였는데, 고종 연간까지 지속되었다. 인력소는 총 6칸 건물이었는데, 1766년 관상감 영사홍봉한의 주도로 천문직려(天文直廬) 남쪽에 처음 세웠다. 천문직려가 관천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인력소도 관천대 서쪽 부근에 관상감의 여러 청사들과 함께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력소에서는 각사(各司)에 나누어 줄 것과 관상감에서 사유(私有)할 역서를 모두 보관하였는데, 각 관청에서는 이듬해에 사용할 역서의 종이 값과 종이 등을 인력소에 먼저 보내고, 인력소는 다시 이것을 관상감의 재화 출납을 맡은 관상감의 관청(官廳)으로 보내었다. 원래 역서의 종이 값은 관청에서 받았는데, 대개 종이와 돈이 서로 뒤섞여 들어오다 보니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는 데 규칙이 없고 점차 문란해졌다. 이에 1764년 관상감 제거정홍순(鄭弘淳)이 이 그릇된 관습을 바로잡고 낭비에 관계되는 것을 삭제하여 식례(式例)로 정하였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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