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李鴻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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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개설

이홍장은 1847년 회시에 합격하여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증국번(曾國藩)의 막료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증국번의 천거로 1862년 강소순무사가 되었다. 1870년 8월 직례총독겸북양대신으로 임명되어 이후 25년간 청국의 외교·군사에 관한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것은 물론 양무운동을 주도하여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조선 정책 역시 주도하여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내정 및 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 문제를 놓고 일본과 대결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열강과 교섭하여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였다.

가계

이홍장은 1823년 이문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1838년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형부(刑部) 낭중(郎中), 기명어사(記名御史)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형 이한장(李瀚章)은 이홍장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의 난에서 공을 세워 사천총독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이홍장은 1844년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으나 이듬해 회시(會試)에서 낙방하였다. 이후 부친의 명으로 북경으로 가 증국번의 문하생이 되었다. 1847년 회시에 합격하여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가 되었고, 3년 후에는 편수(編修)가 되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료가 되어 그의 명으로 강소(江蘇)·절강성(浙江省)의 태평천국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회군(淮軍)을 조직하였고, 증국번의 천거로 강소순무(江蘇巡撫)에 임명되었다. 1864년 이홍장은 회군을 이끌고 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남경을 함락하였다. 태평천국군이 진압된 뒤 1866년 말 청 정부는 이홍장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다시 염군(捻軍)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염군 토벌에 성공한 이홍장은 1870년 초에는 서남의 묘민(苗民) 봉기, 서북의 회민(回民) 봉기 등 민란을 진압하며 정부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8월 이홍장은 직례총독겸북양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청국의 외교, 군사에 관한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것은 물론 양무운동을 주도하여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양무운동을 군비뿐만 아니라 상업 면에서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872년 11월 상해에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방적·방직·광산·항운·철로·기선·전신·전보 등 각 산업 분야에서 관독상판의 형식으로 기업을 육성하였다.

이홍장은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근대적 해군을 양성하였다. 그는 1874년 일본의 대만 정벌 사건, 1884년 청불전쟁 등을 계기로 해방(海防)을 위해 근대적인 해군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영국·독일 등지에서 함대를 구입하여 1888년 북양함대를 정식으로 건립하였다.

이홍장은 외교 면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870년 천진(天津)에서 발생한 반(反)기독교운동의 사후 처리를 담당하였고, 1871년에는 일본과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그 뒤 대만·유구(琉球)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홍장은 군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전쟁보다는 일본과 화의를 체결하는 것을 택하였다.

1879년 일본은 유구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홍장은 유구 사건을 경험하며 일본 세력이 동아시아에서 크게 확장되는 것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도 일본 세력이 확장될 것을 우려한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하며 조선 정부와 미국 간의 조약 체결 교섭을 주도하였다(『고종실록』 16년 7월 9일). 또 1882년 7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군을 파병하여 진압하고 난의 주모자로 대원군을 지목하여 청으로 납치·유폐하였다(『고종실록』 19년 11월 5일). 이후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명문화하였다.

이홍장은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역시 군대를 파견하여 정변세력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정변의 사후 수습을 위하여 천진에서 일본 측 전권대신이등박문(伊藤博文)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청일 양국 군대의 공동철병과 장래 조선에 병력을 파견할 경우 상대국에 통고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4일).

1888년 이홍장은 영국과 독일에서 15척의 군함을 구입하였고, 그중 8척을 북양해군에 배치하면서 북양해군을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북양함대는 이후에도 전함을 확충하여 청일전쟁 직전에 대소 전함 25척을 보유한 강력한 군대로 성장하였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 정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가 청에 원군을 요청하려 한다는 사실을 입수한 일본 정부 역시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으로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농민군이 조선 정부와 화약을 체결하고 사태가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군의 철병을 요구하였고, 청 역시 일본에 공동 철병할 것을 제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으로 출병을 결정한 때부터 이미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청에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을 제시하고 청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청을 상대로 개전하였다.

이홍장은 외교적 타협을 통하여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 정부 내에서도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894년 7월 일본 군함이 조선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격침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후 청군은 계속해서 패퇴하였고, 결국 이듬해 청이 항복하며 청일전쟁은 끝이 났다. 1895년 4월 이홍장은 전권대신으로 아들 이경방, 참모 마건충(馬建忠) 등과 함께 일본 하관(下關)에 파견되어 강화조약을 체결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10일).

이홍장은 1895년 8월 청일전쟁의 패배를 이유로 북양대신에서 면직되었으나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파견되어 청러동맹밀약을 체결하고 유럽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1899년 무술정변이 발발하면서 다시 양광총독 서리로 임명되었다. 1900년 2월 ‘의화단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일본·독일 등 8개국 연합군이 출병하여 북경에 입성하였다. 같은 해 7월 이홍장은 전쟁의 수습을 위하여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복귀하여 북경에서 교섭을 추진하였다. 이홍장은 1901년 9월 400,005,000냥을 배상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11월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문충공전집(李文忠公全集)』

참고문헌

  • 구선희, 『한국근대 대청정책사 연구』, 혜안, 1999.
  • 권혁수, 『19세기 말 한중 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0.
  • 량치차오 지음, 박희성·문세나 옮김, 『리훙장평전』, 프리스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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