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함녕(李咸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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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이사후(李師厚)이고 어머니는 왕조(王珇)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직(李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형제로는 성원군(星原君)이정녕(李正寧)과 이계녕(李繼寧)이 있다. 1435년(세종 17) 식년시(式年試)로 급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종 시대 활동

이함녕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에 사헌부 감찰로 활동하였으나, 1434년(세종 16) 동료 감찰들의 부정행위를 고발하지 않고 은폐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인 1435년(세종 17)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장원으로 급제해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인 전 부윤(府尹)이사후가 세상을 떠났고, 이함녕 역시 2년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세종실록』 16년 10월 30일),(『세종실록』 17년 4월 20일),(『세종실록』 17년 4월 25일),(『세종실록』 19년 5월 14일),(『세종실록』 16년 10월 30일),[『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성품 및 일화

이함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함녕이 과거를 볼 시기에 아버지인 이사후는 병중이었다. 그리하여 이함녕은 아버지의 간호를 위하여 과거를 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사후가 억지로 명령하는 바람에 과거에 응시하고 결국 장원에 뽑혔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날 궁문을 나와 말을 타려 할 때 그 말이 목을 돌려 모자에 꽂힌 꽃을 물어 꺾었는데, 며칠 뒤에 이사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함녕도 2년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일화를 계기로 당시 사람들은 말이 어사화를 꺾는 것이 크게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 여겼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10]

후손

이함녕의 처는 평양 조씨(平壤趙氏) 조견(趙狷)의 딸로서 2남 1녀를 두었다. 1자는 이숙생(李叔生)이고, 2자는 이장생(李長生)이며, 1녀로 성간(成侃)의 처가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용재총화(慵齋叢話)』
  • 『만가보(萬家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