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행(李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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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9년(선조 22)∼1645년(인조 23) = 57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천미(天微) 또는 천미거사(天微居士)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지낸 이사수(李士修)이고, 어머니 풍산 김씨(豐山金氏)는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김선(金詵)의 딸이다. 양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며, 친할아버지는 이계열(李繼悅)이고, 양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이며, 친증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이윤경(李潤慶)이다. 의정부 참찬(參贊)이필영(李必榮)의 동생이기도 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강원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는데, 인조가 청(淸)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주(驪州)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21년(광해군 1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방목(榜目)』] 당시 과거에 급제한 자 가운데 상중(喪中)이던 권귀(權貴)의 자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3년 동안 방방(放榜)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실시한 개시(改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그때 알성(謁聖) 문과에 다시 응시하여 복시(覆試)와 전시(殿試)에 합격하면서,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그해 10월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상례를 끝마치고 1626년(인조 4) 승문원 정자(正字)에 정식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겨울 승문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경기도 여주의 별장에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즉시 필마(匹馬)로 달려가서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간 후 어가를 호종하였다. 그해 2월 성균관 박사(博士)로 옮겼다가 인조가 서울의 궁궐로 돌아오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8년(인조 6) 성균관 박사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옮겼다. 1629년(인조 7)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파직되었고, 1631년(인조 9)에는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오래지 않아 해직되었다.

1632년(인조 10) 1월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그해 7월에 사직하였다. 1633년(인조 11) 4월에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5월 형조 정랑(正郞)으로 옮겼다. 7월에는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나갔으나, 1634년(인조 12) 봄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겨울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가 1635년(인조 13) 여름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도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또 형조 정랑에 임명된 후에도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1636년(인조 14) 6월에는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병으로 체직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 여주 별장에 우거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15일 밤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국경을 침범으며,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여주 별장에서 들었다. 이에 즉시 남한산성을 향해 필마로 달려가서 어가를 호종하려고 하였으나, 경기도 이천(利川)에 이르러 적병에게 길이 막히게 되었다. 전(前) 판서(判書)이현영(李顯英)이 지평(砥平)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즉시 달려가서 의병에 참여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0일 적병에게 쫓겨서 춘천(春川)으로 갔다가 양양(襄陽)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갔는데, 이곳에서 우연히 중간형 이필영(李必榮)을 만나게 되어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두 형제가 서울로 향하여 가던 중 2월 7일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궁궐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제는 즉시 신하로서의 예의를 다하고자 서울 대궐문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임금에게 위문을 드렸다. 이어 가족들이 경상도 예천(醴泉)으로 피난을 갔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을 찾아갔다가 이필행은 병이 나서 즉시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3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였다.(『인조실록』 15년 3월 13일) 그해 여름 이필행은 비로소 여주 별장으로 돌아왔으며, 마침내 벼슬하지 않고 노년(老年)을 여주에서 끝마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김상헌(金尙憲) 등 척화파(斥和派)는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 밑에서 벼슬하기를 꺼려하였는데, 이필행도 서인(西人)으로서 이러한 풍조를 따랐던 것이다. 그 사이에 예조 정랑·군기시(軍器寺) 정·봉상시(奉常寺) 정 및 사헌부 장령의 소명이 있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의 소명이 있었을 때도 병이 이미 고질화되어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고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인조실록』 15년 11월 7일) 그 뒤에도 승문원 판교(判校)·사복시(司僕寺) 정에 임명되었으나, 여주의 별장에서 자연의 풍광을 즐기고 살았다. 그 사이에 사간원 사간에 네 번, 사헌부 집의(執義)에 한 번, 홍문관 응교에 두 번이나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인조실록』 17년 7월 11일)

이렇게 그는 여주 별장에서 8년 동안 은거생활을 하였다. 만년에 자기의 호를 ‘타고난 미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천미거사(天微居士)’라고 스스로 일컫고, 밭에다 약초(藥草)를 심고 집에서 독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서실(書室)에는 항상 『소학(小學)』 1권을 책상 위에 두고 이를 읽고 실천하였는데, 이것도 증조할아버지 이준경의 유풍(遺風)을 따른 것이었다. 1645년(인조 23) 1월 갑자기 병이 나서 그해 2월 초3일에 여주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8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필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순수하고 엄정(嚴整)하였으며, 행실이 청백하고 검소하였다. 평생 자기 절조(節操)를 지키고, 겉으로 꾸미거나 거만하게 굴어 남의 감정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학문에 대한 의지가 굳세어 마치 ‘천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소나무’와 같았는데, 이필행은 증조할아버지 이준경의 유풍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였다.

1589년(선조 22) 7월 28일 이필행은 서울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윤선도(尹善道)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면서 가깝게 지냈다. 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아버지 이사수는 막내아들에게 『소학』을 가르치고, 반드시 이것을 실행하라며 이름을 이필행(李必行)으로 지어주었다. 『소학』을 생활 준칙으로 삼은 것은 이준경이 일찍이 가법(家法)으로 정하여 대대로 지켜온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1607년(선조 40) 맏형인 홍문관 교리(校理)이필형(李必亨)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필행은 너무 슬픈 나머지 병을 얻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또 1614년(광해군 6) 어머니 풍산 김씨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필행은 반드시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칼로 자기 허벅지를 베어 피를 내어 약(藥)에 타서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필행은 자기의 정성이 미약하여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항상 통분해 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여주 별장에 있었다.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적병에게 길이 막히는 바람에 지평에서 의병에 참여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0일, 오랑캐 군사의 추격을 받아 춘천 방면으로 들어갔는데, 적군을 피하여 산 위로 기어 올라가서 5일 동안 눈 속에서 잠을 자다가 몸이 얼고 굶주려 거의 죽게 되었다. 문득 눈 위에 사람 발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국을 따라 가다 사람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수십 리 밖에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니 바로 양양 땅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쪽에 위치한 강릉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중간형 이필영을 만나게 되었다. 중간형 이필영은 평안도 가도(椵島)에 가서 명나라 도독(都督)심세괴(沈世魁)를 만나고 조정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난리를 만나 오랑캐 군사를 피해 전전(輾轉)하던 끝에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하늘이 시킨 일이라고 감사하였다.

이필행은 일찍이 함경도 경성판관과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냈다. 두 번이나 외직(外職)에 임명되어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음에도 구례(舊例)의 녹봉(祿俸)에 대해서는 비록 하찮은 반찬 하나라도 전혀 줄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이필행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스스로 높은 대우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規例)인데, 어찌 내가 줄여서 공가(公家)의 체면을 손상시키겠는가.”라고 하였다. 자기 경내(境內)에 흘러들어 와서 사는 가난한 외지(外地) 사람들을 적극 구제하였고, 또 멀리서 자기를 찾아온 가난한 친구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이때 이필행이 말하기를, “내가 비루하게 탐욕스럽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 차마 인정미 없는 짓을 하며 청렴한 명예를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아들과 딸에게 말하기를, “나는 중국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처럼 벼슬에 오르지 못할 적에 몹시 가난해서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벼슬이 있을 때라고 하더라도 차마 너희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필행(李必行)은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잠시 출사(出仕)했다가 곧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광해군 때 폐모(廢母) 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았던 영남의 김령(金坽),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인조 때 기호(畿湖)의 이필행(李必行)은 처음부터 벼슬에 뜻이 없었던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미원현(迷源縣)울업산(蔚業山) 무돈곡(茂敦谷)의 언덕에 있는데, 윤선도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무덤은 지금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에 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윤담무(尹覃茂)의 딸이자, 관찰사윤지경(尹知敬)의 누이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명징(李明徵)은 일찍 죽었고, 차남 이후징(李厚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고, 딸은 참봉(參奉)이사량(李四亮)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3남 1녀를 낳았는데, 이하징(李下徵)·이종징(李從徵)·이서징(李庶徵)이다. 차남 이후징의 맏아들 이시만(李蓍晩)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參判)과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냈고, 셋째아들 이의만(李宜晩)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으며, 넷째아들 이이만(李頤晩)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지냈다. 또 사위 이사량의 맏아들 이화봉(李華封)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산유고(孤山遺稿)』
  • 『둔촌잡영(遁村雜詠)』
  • 『동고유고(東皐遺稿)』
  • 『계암집(溪巖集)』
  • 『염헌집(恬軒集)』
  • 『청성집(靑城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