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李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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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 = 6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이자 유일(遺逸). 평창군수(平昌郡守)와 순천군수(順川郡守) 등을 지냈다. 자는 천구(天衢) 또는 사달(士達)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양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낸 이인상(李麟祥)이고, 양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판관(判官)김홍(金洪)의 딸이다. 친아버지는 경산현감(慶山縣監)을 지낸 이원근(李元謹)이며, 친어머니 정씨(鄭氏)는 현감(縣監)정희경(鄭熙慶)의 딸이다. 양할아버지는 해풍군(海豊君)이함(李)이고, 친할아버지는 좌수사(左水使)이울(李菀)이다. 양증조할아버지는 이의번(李宜蕃)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판관(判官)을 지낸 이의석(李宜碩)이다. 이조 판서(判書)이경증(李景曾)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6촌 형인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이귀(李貴)와 가깝게 교유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그러나 대과(大科)에 실패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유일로 천거를 받아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나갔고, 6품으로 오른 뒤에는 내직(內職)을 거쳐 고산현감(高山縣監)과 흡곡현령(谷縣令守) 을 역임하였는데,(『선조실록』 36년 3월 10일)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평가를 받았다.(『선조실록』 36년 3월 22일) 이후 평창군수(平昌郡守)로 승진하였고, 순천군수(順川郡守)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목대비(仁穆大妃)까지 폐출하려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아예 가족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광주(廣州)의 선영(先塋) 아래에 숨어 살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1620년(광해군 12) 5월 26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강직하고 고결하였다. 친아버지 이원근은 그가 9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이통에게 이이를 찾아가 공부하도록 하면서, 그의 종질(從姪)인 이이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을 부탁하였다. 이통의 아버지 이원근과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4촌간이었다. 이이는 6촌 동생인 이통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영특하고 문예(文藝)에도 뛰어났으므로, 이이가 애지중지하는 제자가 되었다.

이통은 나이 29세 때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그보다 앞서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는데, 경서(經書) 부문에서 모두 ‘통(通 : 통과)’의 점수를 받았으나, 『중용(中庸)』 부분에서 한 글자를 잘못 외우는 바람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때 이통은 웃으면서 “이는 운명이다.”라고 하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방목(司馬榜目)』을 보면, 27세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으나, 진사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언제나 온화하고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형제자매와도 즐겁고 화락하게 지냈다. 그러나 집안을 엄격하게 다스렸으므로, 한 사람도 친압(親狎)하거나 희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집안이 조정처럼 엄숙하였다. 이통은 아들들에게 의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특히 학문을 열심히 하도록 권장하였는데,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밤이 늦어야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아무리 덥고 추운 날씨라고 하더라도 경서를 외우고 문장을 익히도록 하였다. 또한 아들들에게 가끔씩 천역(賤役)을 시키면서 “거친 옷을 입는 것은 선비의 본분이니,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아들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들어, 비록 신혼일 지라도 좋은 옷을 입지 않았다.

이통이 교유한 사람은 모두 당시의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이덕형·이정구·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이귀 등과 가장 깊게 사귀었다. 그가 마포(麻浦)와 서강(西江) 사이에 있는 서호(西湖)에 살 때, 이정구가 여러 차례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정구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어찌 감히 전형(銓衡 : 인사 행정)을 맡은 사람의 집 대문을 밟겠는가.”라고 대답하였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집에 찾아가면 사람들이 그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구하려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 때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 이때 영창대군의 관(棺)이 서호를 거쳐 지나가자, 이통은 강가로 나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려고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이를 말렸으나 그는 선왕(先王 : 선조)의 어린 아들이 죄 없이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망곡례를 강행하였다. 오래지 않아 인목대비까지 폐출하려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는 그날로 살던 집을 걷어치우고 광주 대왕리(大旺里)의 선영 아래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 모후(母后)를 폐위시키는 이때에 어찌 잠시라도 서울 도성 안에 머물러 있겠는가.” 하고는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는 떨어진 패랭이[蔽陽子]를 쓰고 황소[黃牛]를 타고 들판을 소요하기도 하며, 혹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조리기도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고 전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광주 대왕리의 언덕에 있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무덤은 지금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산37-1에 있다.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영의정시령부원군(始寧府院君)유전(柳)의 딸인데, 자녀는 5남을 낳았다. 장남 이경안(李景顔)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고, 차남 이경민(李景閔)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배천군수(白川郡守)와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지냈다. 3남 이경용(李景容)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4남 이경헌(李景憲)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參判)과 예조 참판을 지냈다. 5남 이경증(李景曾)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다. 측실(側室)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송상눌(宋相訥)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정(李程 : 이경헌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지냈고, 손자 이치(李穉 : 이경증 아들)는 진사로서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손자 이혜(李嵆 : 이경증 아들)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부인 문화 유씨는 단정하고 유순하였는데, 13세에 동갑인 이통(李通)에게 시집와서 아들 5형제를 낳았다. 부부는 아들 5형제를 직접 가르쳤는데,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출세하였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으나, 문화 유씨는 남편 이통의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을 준비해서 대접하였고, 시부모를 모시면서 부지런히 길쌈을 하였는데, 늙을 때 까지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판서와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므로 집안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나, 의복과 음식은 여전히 검약(儉約)하였다. 만년에 여러 아들들이 교대로 늙은 어머니를 맡아서 봉양하였지만, 검약한 생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남편 이통이 세상을 떠난 뒤 28년을 더 살다가 9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광주 대왕리에 있는 남편 이통의 무덤 왼쪽에 묻혔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대동야승(大東野乘)』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