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李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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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8년(연산군 4)∼1554년(명종 9) = 57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이조 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자는 자정(子淨)이고, 호는 수곡(守谷)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이험(李嶮)이고, 어머니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부정(副正)정옥(鄭沃)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을 지낸 이육(李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정(正)을 지낸 이지(李墀)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1523년(중종 18) 알성(謁聖)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26세였다.[『방목(榜目)』] 1525년(중종 20)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1527년(중종 22)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그 해 감시(監試) 합격자의 성적이 부진하여 등외 자를 선발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들어 인재양성을 건의하였다.(『중종실록』 22년 8월 16일),(『중종실록』 22년 9월 5일)

1528년(중종 23) 이조 좌랑이 되었고, 1529년(중종 24)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23년 7월 8일),(『중종실록』 24년 11월 30일),(『중종실록』 25년 3월 22일) 이어 병조 정랑(正郎)이 된 후 간관(奸官)을 적발하는 임무를 띤 추생어사(抽栍御使)가 되어 지방으로 파견되었다.(『중종실록』 25년 12월 2일) 1531년(중종 26)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마침 정계에 복귀한 김안로(金安老)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부여현 은산역(恩山驛)에 유배되었다.(『중종실록』 26년 2월 18일),(『중종실록』 26년 2월 20일),(『중종실록』 26년 2월 27일),(『중종실록』 26년 3월 12일)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축출되자 사면되어 1538년(중종 33)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간원 사간(司諫)과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와 홍문관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중종실록』 32년 10월 27일),(『중종실록』 33년 1월 10일) 1539년(중종 34)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34년 윤7월 9일) 1540년(중종 35)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중종실록』 35년 5월 12일),(『중종실록』 35년 10월 20일) 1541년(중종 36)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1542년(중종 37) 이조 참의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중종실록』 36년 10월 25일),(『중종실록』 37년 4월 4일),(『중종실록』 37년 8월 13일) 1543년(중종 38)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승정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38년 1월 28일),(『중종실록』 38년 8월 10일) 이어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참가하는 중시(重試)에서 2등을 하면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중종실록』 38년 9월 27일) 1544년(중종 39)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중종실록』 39년 1월 24일)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군령(軍令)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고(推考)되었다.(『명종실록』 1년 4월 8일),(『명종실록』 1년 6월 8일) 1548년(명종 3)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3년 8월 30일),(『명종실록』 3년 11월 2일) 1551년(명종 6)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었으나, 곧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로 전임되었다.(『명종실록』 6년 6월 25일),(『명종실록』 6년 12월 6일) 1553년(명종 8) 용양위(龍驤衛) 호군(護軍)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54년(명종 9)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명종실록』 8년 윤3월 26일),(『명종실록』 9년 8월 27일)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임유겸묘비(任由謙墓碑)」와 「신자건묘비(愼自健墓碑)」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이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대범하고 고요하여 일찍이 시세(時勢)에 붙좇은 적이 없었다. 만년에는 병이 많아 한직(閑職)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출사(出仕)하지 않고 녹(祿)만 먹는 것은 의(義)가 아니라며 서반(西班)에 있었음에도 녹을 받지 않고, 봉조하(奉朝賀)의 박한 녹만 받다 죽었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가난으로 그의 장사를 지내지 못하자, 명종은 그에게 별치부(別致賻)를 내려주도록 하였다.(『명종실록』 9년 8월 27일)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허자(許磁)와 이찬(李澯)은 대과에 오르기 전, 성균관에서 같이 기거하였다. 허자는 이찬보다 두 살 위였으므로, 그가 매번 이찬의 윗자리에 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허자가 꿈을 꾸고 난 뒤부터 매번 이찬에게 윗자리를 양보하고 자기가 아랫자리에 앉았다. 1523년(중종 18) 두 사람이 같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찬이 2등, 허자가 3등이었다.(실제로는 이찬이 알성(謁聖) 문과(文科)의 병과(丙科)1위였고, 허자가 2위였다) 허자는 그때서야 ‘나와 이찬이 과거에 급제를 하였는데, 방에 내 이름이 바로 이찬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그 뒤부터 내가 매번 이찬의 아랫자리에 앉은 것은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 것이요, 이것을 숨기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행여 천기를 누설할까 염려해서였다.’라고 꿈 얘기를 하였다.

묘소와 후손

부인 성씨(成氏)는 성희옹(成希雍)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잡(李磼)이다. 딸은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김계조(金繼趙)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월정만필(月汀漫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해동역사(海東繹史)』
  • 『모재집(慕齋集)』
  • 『면앙집(俛仰集)』
  • 『용문집(龍門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