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李宗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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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강화를 위해 1595년에 명이 파견한 사신 일행 중 정사(正使).

개설

1593년(선조 26) 2월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명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여 가급적 빨리 전쟁을 끝마치려 하였다. 이때 일본 사행의 정사로 임명된 인물이 이종성이다. 그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 있던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중 일본 진영을 탈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가계

1560년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인 남직예(南直隸) 풍양부(鳳陽府) 우이(盱眙)에서 태어났다. 임회후(臨淮侯)이언공(李彦恭 또는 李言恭)의 아들이며, 정국공(定國公) 서문벽(徐文璧)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명의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이종성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천거하여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사신의 정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종성은 1596년 4월 훈위서도독첨사(勳衛署都督僉使)흠차책봉일본정사(欽差冊封日本正使)로 조선에 왔다.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탈출하였다. 당시 사신의 정사는 이종성이고 부사는 양방형(楊方亨)이었지만, 강화 실무는 심유경(沈惟敬)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는 강화의 내용이나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풍문을 듣고 탈출을 감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문과 사상

이종성은 어렸을 때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이종성을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문사(文辭)를 숭상했지만 어리석어 사리에 밝지 못한 인물로 평가하였다(『선조수정실록』 27년 9월 1일). 이로 보아 그의 학문은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외교실무를 맡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던 인물인 것 같다.

심유경은 정사로 임명된 이종성을 담략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선조실록』 28년 2월 11일). 하지만 『선조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이종성을 오랑캐 나라에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 깊이 염려된다고 평가하였다(『선조실록』 28년 9월 4일). 즉 조선인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였다.

명에 돌아간 이종성은 왕의 명을 욕되게 하고 국가의 위엄을 손상시켰으며, 자기 목숨만 살려고 대중을 미혹시킨 죄로 처벌당했다(『선조실록』 29년 9월 8일). 그 결과 그는 명 황제 직속 기관인 금의위(錦衣衛)의 옥에 갇히는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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