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지도출(李宗城之逃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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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4월 4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부산의 일본 진영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의 정사(正使)이종성이 탈출한 사건.

개설

명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 참전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쟁을 조기에 매듭짓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하고 사신을 파견했다. 그런데 봉왜정사(封倭正使)이종성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했다. 이 사건으로 한때 일본과의 강화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명은 정사를 교체하여 다시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역사적 배경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명은 일본과의 강화를 통해 빠른 시일 내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명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심유경(沈惟敬)을 일본 진영에 파견하여 강화 체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송응창이 탄핵을 받아 진전되지 못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했지만 송응창의 뒤를 이은 고양겸(顧養謙)은 명군의 철수 등을 언급하며 조선을 협박하였다. 결국 조선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의 왕으로 봉해달라는 글을 명에 보냈고, 명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발단

명 조정 내부에서도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강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명군 측의 강요에 의해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달라는 글을 보내고, 이어 심유경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거짓으로 꾸민 풍신수길의 항복문건이 제출되면서 명은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하고 책봉사(冊封使)를 파견했다.

책봉사에 임명된 인물은 정사이종성, 부사양방형(楊方亨)이었다. 이들은 1595년 1월 30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3일 압록강을 건넜고, 4월 28일 모화관에서 선조와 만났다. 양방형은 7월, 이종성은 9월 일본군 진영이 있는 남쪽으로 이동했고, 양방형은 10월, 이종성은 11월 일본군 진영으로 향했다.

경과

명과 일본 간의 강화가 이루어진 것은 심유경과 소서행장 등이 명 황제와 풍신수길을 속인 데 따른 것이었다. 즉 명에서는 풍신수길이 항복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풍신수길은 명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강화의 전제조건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이종성은 1596년(선조 29) 4월 4일 새벽 일본군 진영을 탈출했다.

이종성이 탈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종성이 원래 성질이 비겁하여 풍신수길이 명 사신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말에 놀라서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강화 자체가 소서행장과 심유경의 기만행위임을 알고 후환이 두려워서라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심유경의 책동 때문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명사(明史)』에서는 욕심이 많고 음란해서 일본군 장수에게 쫓겨나자 쇄서(璽書)를 버리고 탈출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종성은 자신이 탈출한 이유에 대해 일본에 건너간 심유경이 풍신수길에게 결박당했기 때문에 자신이 국명(國命)을 욕되게 할까 염려되어서였다고 밝혔다(『선조실록』 29년 4월 20일). 실제로 그는 일본에 머물러 있던 명나라 사람 소명학(蕭鳴鶴)과 왕삼외(王三畏) 등으로부터 풍신수길이 명 사신이 일본에 오면 가둔 후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때문에 신변에 위협을 느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일본군 진영을 탈출한 이종성은 울산·경주·한성 등을 거쳐 명으로 돌아갔다. 명 조정은 국가를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이종성을 명 황제 직속 기관인 금의위(錦衣衛)의 옥에 가두었다. 이종성 탈출사건으로 명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고, 일본은 강화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명은 양방형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다시 강화를 추진하였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최소자, 『명청시대 중·한관계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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