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李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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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9년(선조 22)∼1668년(현종 9) = 80세]. 조선 후기 광해군(光海君)~현종(顯宗) 때의 문신.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냈다. 자는 노천(老泉)이며, 초명은 이종(李淙)이었으나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후 기휘하여 이호(李滈)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효종(孝宗)이 1645년(인조 23)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그의 휘인 이호(李淏)를 피하여 다시 이정(李淀)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수일(李守一)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정종(定宗)의 현손인 장원감(長原監) 이귀년(李貴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주부(注簿)이란(李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이완(李浣)의 형이다. 이조 참판(參判)김반(金槃)의 사위이자, 김장생(金長生)의 손녀사위이며, 그의 문인이기도 하다.

광해군~현종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1619년(광해군 11) 천거되어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으나, 광해군 말기의 문란한 정치 상황에서 벼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이괄(李适)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이정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은 4도(道)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어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과 함께 반란을 진압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21일),(『인조실록』 2년 2월 21일) 이때 이정도 상경하여 아버지 이수일을 도와 반란군 진압에 참가하였는데, 관군을 거느리고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수복하면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아버지 이수일은 그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훈되고,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인조실록』 2년 3월 8일) 반란이 진압 되자, 이정은 다시 거창으로 돌아와 직무를 수행하였다.

1628년(인조 6) 호조 좌랑(佐郞)을 거쳐 호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1632년(인조 10) 안성군수(安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상례를 치렀고, 이후 정3품하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다시 호조 정랑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후, 의금부 경력(經歷)으로 전임되었다가, 1640년(인조 18)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 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면서 1642년(인조 20)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거쳐서 1646(인조 24)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647년(효종 1)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상례를 마친 후 1651년(효종 2) 배천군수(白川郡守)가 되었으며, 1653년(효종 4)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그의 치적(治積)이 도내에서 최고라고 보고하자, 임금이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였다.(『효종실록』 4년 6월 19일) 1655년(효종 6)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 되었다.(『효종실록』 6년 2월 6일) 그가 80세 되던 해인 1668년(현종 9) 종2품하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경림군(慶林君)에 습봉(襲封)되었으나,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9년 1월 12일)

성품과 일화

이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훤칠하게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다웠다.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씩씩하였으며, 함부로 말을 하거나 웃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에 거리를 두지 않았으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장수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계림부원군이수일을 따라 군중에 머문 일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제들에게 거만하고 방자한 일은 절대로 못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힘써 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교훈대로 문예에 힘썼는데, 당대의 대유학자인 김장생의 집안에 장가들고 부터는 더욱 자신을 낮추어 공경하며 공손하였다.

주·군(州郡)의 수령관으로 있을 때에는 오로지 자기 직분을 다하였으며, 권세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들고 방문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여색을 삼갔다. 만년에 『한중록(閒中錄)』 3권을 편술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복성동(福城洞)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김씨(金氏)는 도사(都事)김진선(金盡善)의 딸이다. 둘째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이조 참판(參判)의 딸로서 김장생의 손녀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인석(李仁碩)은 음직(蔭職)으로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차남 이인하(李仁夏)는 무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장녀는 관찰사(觀察使)홍주삼(洪柱三)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서석집(瑞石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창주유고(滄洲遺稿)』
  • 『서석집(瑞石集)』
  • 『사계유고(沙溪遺稿)』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 『지호집(芝湖集)』
  • 『청음집(淸陰集)』
  • 『동사록(東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