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점(李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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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6년(세종 28)∼1522년(중종 17) = 77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숭보(崇甫)이고,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도 이천(利川)이다. 아버지는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을 지낸 이관의(李寬義)이고, 어머니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수사(水使)강순경(姜舜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주판관(義州判官)을 지낸 이지(李智)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밀(李密)이다. 아버지 이관의가 성리학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몸가짐이 바르고 곧아서 가는 곳마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으며, 성리학의 어려운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일월·성신의 천문학(天文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예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32세가 되던 1477년(성종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에 분속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성균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이후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어 밀려있던 노비(奴婢) 송사(訟事)를 신속하게 모두 처리하였으며,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막료(幕僚)로 발탁되었는데, 그의 행정에 결점이 없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서연(書筵)에서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燕山君)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치자, 세자 연산군이 이점의 강론에 흥미를 갖고 귀를 기울였다. 이후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군사의 기무들을 빈틈없이 관리하였다.

그런 가운데 날로 늙고 병들어 가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고을의 수령관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여, 이천(利川)의 집과 가까운 용인현감(龍仁縣監)으로 부임하였다. 고을을 다스리다가 여가에는 고향집을 왕래하면서 어버이에게 문안을 드리고 병환을 구료하며 효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현감의 임기가 차기도 전에 어버이의 상(喪)을 연달아 당하면서 이천의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슬픔과 예절을 다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어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가니, 성균관 유생들이 훌륭한 강론을 하는 사유(師儒)가 다시 돌아왔다고 모두 기뻐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4년(연산군 즉위년)12월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싸움이 심해지자, 이를 피하여 이점은 성균관 사유의 녹권(錄券)을 가진 채 전라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그러나 성균관 안팎에서 비난이 일자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왔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여 사림파가 숙청당하면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의 자리가 비자, 적임자를 얻기 어려워서 이점을 성균관에서 차출하여 품계를 승진시켜 사간에 임명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1월 5일) 그때 성균관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였고, 조정에서도 훌륭한 사표(師表)를 성균관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얼마 뒤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다시 학관(學館)으로 돌아가자, 유생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학생들은 경전을 들고 스승의 앞에 나가서 어려운 부문을 물었으며, 이점은 명쾌하게 그 뜻을 해설하여 주었다. 그러나 관리를 선출하는 부정을 막기 위하여 1499년(연산군 5)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는데, 권신(權臣)과 귀신(貴臣)의 부정을 탄핵하다가 결국 파직되었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

1500년(연산군 6) 연산군이 이점을 서용하라는 명령을 내려 사도시(司導寺) 정(正)에 임명되었다. 그때 도망한 죄인이 외딴 바닷섬[海島]으로 도망하여 해적 두목이 되어 우리나라 어선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이점은 초토부사(招討副使)에 임명되어, 초토사(招討使)전림(田霖)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해랑도(海浪島)로 가서 해적을 토벌하였다. 연산군이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이점을 봉상시(奉常寺) 정에 임명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7월 9일) 1501년(연산군 7)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마침내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어 육조를 총괄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6월 4일),(『연산군일기』 8년 8월 10일),(『연산군일기』 8년 10월 21일),(『연산군일기』 8년 11월 5일)

1503년(연산군 9)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1월 21일),(『연산군일기』 9년 2월 3일) 그때 전림이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로 있다는데, 이점을 반갑게 맞아 두 사람이 경상도의 행정과 방어에 서로 최대한 협력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7월 3일) 이후 이점이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흰꿩[白雉]을 얻었으므로, 연산군에게 이를 바쳤다.(『연산군일기』 9년 8월 29일)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는데, 이 해에 임사홍(任士洪) 부자로 인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모든 고관(高官)들이 숙청을 당하였다. 임사홍 일당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는 이점을 몰아내고자, 이점이 흰꿩을 왕에게 바친 것은 임금에게 아첨하려기 위해서라며 무고하였다. 그리고 임사홍은 이점을 체포하여 장(杖) 80대를 때리고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귀양을 보냈다.(『연산군일기』 10년 9월 30일)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중종이 등극하자, 바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발탁되어 성균관 유생들을 지도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20일) 이때 이점의 건의에 따라 새로 임금이 된 중종은 성균관 유생 이심(李深)을 사정전(思政殿)에 데려다가 강론(講論)을 시켰는데, 이점이 옆에서 어려운 부분의 해설을 도와주었다.(『중종실록』 1년 12월 15일) 이것은 성종(成宗)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이점의 아버지 이관의가 성리학에 조예가 깊다는 말을 들은 성종이 이천(利川)에 살고 있던 이관의를 불러다가 강론을 시키고, 강론을 잘한다며 유의(儒衣) 한 벌을 하사한 적이 있었다. 1507년(중종 2)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508년(중종 3) 형조 판서(判書)가 되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중종실록』 3년 4월 19일) 그때 명(明)나라에서 중종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冊封)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사은사를 보냈던 것이다. 사은사 부사이점은 사은사인 좌의정박원종(朴元宗)과 함께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무종(武宗)정덕(正德) 황제에게 사은하고 돌아왔으며, 중종은 그 공로를 포상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시키고 한성부판윤에 임명하였다.(『중종실록』 3년 9월 10일),(『중종실록』 3년 11월 10일)

1509년(중종 4) 한성부판윤으로서 이점은 연산군 때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쓴 자들의 호적을 다시 만들고 몰수당한 재산을 되돌려주었다. 이점의 신속한 행정 덕분에 모든 것이 바르게 정상화되었으므로, 위로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너나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이점을 만날 때마다 이마에 손을 얹고 감사를 표하였다. 또 한성부판윤으로서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며 시간을 내어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쳤다. 1512년(중종 7)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가서 기호 지방의 백성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중종실록』 7년 9월 23일) 1514년(중종 9) 교서관(校書館) 제조(提調)가 되어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515년(중종 10) 나이 70세가 되었다고 치사(致仕)하니 중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성균관 동지사로서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0년 1월 11일) 1516년(중종 11) 한직인 중추부(中樞府) 동지사로 옮겼다가, 종묘서(宗廟署) 제조(提調)가 되었다. 1517년(중종 12) 성균관 동지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중종실록』 12년 11월 6일)

1518년(중종 13) 조광조(趙光祖)의 신진 사류파(士類派)가 중종의 신임을 받고 과거 제도를 폐지하는 등 학문의 풍토를 새롭게 바꾸자, 많은 성균관 유생들도 조광조를 추종하였다. 이에 성균관 동지사였던 이점은 노병을 핑계대고 관직을 사임한 후 고향 이천(利川)으로 돌아왔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의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의 사림파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그러나 이천에 은거하던 이점은 조정과 연락을 끊고 자연을 즐기며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4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다가 1522년(중종 17) 3월 15일 노병으로 이천의 고향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7세였다.(『중종실록』 17년 3월 15일)

성품과 일화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음이 크고 겉이 화평하며, 말씀이 겸손하고 기운이 온화하였다. 안으로 친척들을 대하고 밖으로 친구들을 상대할 때 마음이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그는 지위가 아주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서 남과 원수를 맺지 않았고, 마음이 청렴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특이하게 드러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 자기 녹봉이 집에 들어오면, 그 절반을 떼어서 배고픈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의상이 상자 속에 여벌이 있으면, 나머지 옷들을 꺼내어 추운 사람들을 나누어주었다. 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주식(酒食)을 갖추어 대접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으며, 질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의약을 사주어 목숨을 살렸다. 관청의 일을 다스리고 자기 몸을 지키는 데에 매우 근신하여, 지나치거나 잘못된 것이 조금도 없어서 살아서는 남의 비난을 들은 적이 없었고 죽어서는 남의 저주를 부른 적이 없었다.

이점은 임종할 때 그의 아들 이종기(李宗箕)에게 자기가 쓴 ‘청근성신(淸勤誠信)’이라는 네 글자의 족자를 건네주었는데, 그 뜻은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아들 이종기는 아버지 이점이 쓴 족자를 집안에 전하는 가보로 삼았다.

1500년(연산군 6) 연산군이 이점을 서용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사도시 정에 임명되었다. 그때 도망친 죄인이 외딴 바닷섬으로 들어가서 중국의 바닷가 백성들을 모집하여 해적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출몰하며 우리 어선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명나라에게 이들을 수색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니, 명나라에서 이를 정벌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전림을 초토사로 삼고 이점을 초토부사로 삼아 해랑도에 가서 해적들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사람마다 이것을 아주 위태롭게 여겼으나, 이점은 친구들과 작별할 때 언어와 안색에 조금도 그런 기미를 나타내지 않고, 웃으며 담소하다가 어명을 받고 떠났다.

군선(軍船)을 이끌고 평안도 용천(龍川)에서 돛을 올려 신도(薪島)·녹도(鹿島) 등을 거쳐 20여 일을 항해하여 곧바로 그들의 소굴 해랑도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우지 않고 해적의 항복을 받고 해적에게 붙잡혀 갔던 약간 명의 남녀를 모두 데려왔으므로, 연산군이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이점의 품계를 3등급을 승품시키고 봉상시 정에 임명하였다. 해랑도는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를 연결하는 해로(海路)에 있던 작은 섬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해로에 있었다. 이때 해랑도로 도망한 죄인이 해적의 두목이 되어 해랑도를 근거지로 삼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무역하는 상선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면, 선조(宣祖) 때 가도(椵島)에서 세금을 거두어, 조선·명나라·청(淸)나라 사이에서 국제 문제를 일으켰던 명나라 파락호(擺落戶 : 낙오병) 출신 모문룡(毛文龍)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상 우리 해적은 극히 드문 일인데, 후세에 정약용(丁若鏞)은 이에 대하여 “옛날에 이점·전림·조원기(趙元紀) 등이 서해로 나아가 해적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들이 『정토록(征討錄)』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그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랑도는 아마도 조그마한 섬이었을 것이다.” 하였다.[『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8]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利川) 서쪽 양악산(陽嶽山) 선영에 있는데, 이점의 유언에 따라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의 무덤을 옮겨서 합장하였다. 박상(朴祥)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현재 무덤의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이다.

부인 전주 유씨는 군수(郡守)유맹기(柳孟沂)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이종기는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지냈고, 딸은 감찰(監察)강세구(姜世矩)의 처가 되었다. 부인 전주 유씨가 일찍 세상을 떠났나, 이점은 재혼하지 않았다. 측실에서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종실(宗室) 영산감(瀛山監) 이신(李信)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역대요람(歷代要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허백정집(虛白亭集)』
  • 『이요정집(二樂亭集)』
  • 『충재집(冲齋集)』
  • 『순암집(順菴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검재집(儉齋集)』